🟢 유비(劉備)의 아내 검협선자(劍俠仙子) 손상향(孫尙香) 이야기 2

2022. 12. 19. 06:57카테고리 없음

🟢 유비(劉備)의 아내 검협선자(劍俠仙子) 손상향(孫尙香) 이야기 2

5. 손상향은 언제 어떻게 유비에게 시집갔는가?

<<자치통감>>에는 명확히 일자를 기록하고 있다: 건안14년(209년) 12월이다. 왜 유비에게 시집갔는가? 사실, 이것은 중국역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정략결혼이다. 적벽대전이후, 손유동맹을 강화하고, 공동으로 조조에 대항하기 위하여, 손권이 적극적으로 자기의 여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유비가 동오로 와서 결혼한 것인가? 아니면 손권이 여동생을 유비에게 보낸 것인가?  나관중의 <<삼국연의>>는 전자를 취했다. 장소는 경구(京口), 즉 지금의 진강(鎭江)이라는 것이다. 일부 민간전설이나 희곡에서도 대부분 이 설을 취하고 있다. 오늘날 진강에는 많은 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다. 다만,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유비가 경구에 와보기는 했지만, 그것은 건안15년 12월이었다. 이때는 유비와 손상향이 결혼한 후 1년이 지난 때였다.

이때 유비가 경구로 온 이유는 <<자치통감>>에 명확히 적고 있다. 즉, "유표의 옛 신하들이 유비를 많이 따랐다. 유비는 주유가 준 땅이 너무 적어서 이들을 모두 수용하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경구로 와서 손권을 만나, 형주도독의 자리를 달라고 한 것이다" 이 사료에 따르면, 유비가 이번에 온 목적은 나중에 자주 얘기하는 "형주를 빌리기 위한 것"(借荊州)이었다. 이때 주유는 형주를 빌려주는데 반대했고, 동오의 모사인 여범도 손권에게 유비를 남게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손권은 이를 듣지 않는다. 유비는 공안에 되돌아온 후에 그 내막을 듣고 탄식한다: "천하의 지모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비슷하구나. 그때 공명이 나에게 홀로 가지 말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나는 위급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 것인데, 이 길은 정말 위험한 길이었구나, 하마터면 주유의 손을 벗어나지 못할 뻔했다" 유비는 자신이 경솔했음을 후회했다.

이런 기록으로 보면, 나관중의 소설이나 일부 민간전설이나 희곡이나 모두 사실에 부합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유비가 경구에 도착한 시간을 일부러 1년 앞당긴 것이다. 그리하여, '유비결혼'과 연결시켜버린 것이다. 나관중은 소설가이므로 소설의 재미를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하였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당시 손권이 여동생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장소는 어딜까? 그 답안은 바로 호북성 석수에 있는 수림산(綉林山)이다. 원나라 사람인 호림성이 <<자치통감>> 권276에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강릉부 석수현 사보에 유랑포(劉郞浦)가 있는데, 촉의 선주 유비가 오녀를 맞이한 곳이다" 이외에, 근대사람 노필이 <<삼국지집해>>를 씀녀서 <<일통지>>를 인용하여, 유비가 영친한 곳이 바로 수림산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6. 유비와 손상향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유비의 나이는 49살이고, 손상향의 나이는 27살이 되지 않았다. 최대한으로 보더라도 두 사람의 나이차이는 스무살이 넘는다. 이것은 늙은 남편과 젊은 아내의 전형적인 조합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두 사람이 결혼후에 서로 화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억측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두 사람의 결혼은 정치적인 색채를 띄고 있고, 거기다가 손상향의 성격까지 덧붙여서 정치역학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할 수 있는 관계인 것은 사실이다.

<<삼국지. 법정전>>에 따르면, "누이(손상향)는 재주가  재빠르고 강맹하여, 오빠들과 비슷한 기풍이다. 시비 백여명이 모두 칼을 들고 시립하여있어, 선주(유비)가 매번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마음이 항상 두려워했다"라고 적혀 있고, <<삼국지. 조운전>>에서 주석으로 인용한 <<운별전>>에 따르면 "이때 선주는 손부인이 손권의 누이동생이라는 것을 내세워 교만하고 여러 번 오나라병사들을 이끌고 종횡하며 불법적인 일을 하였다. 선주는 조운이 엄중하여 반드시 제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내사의 일을 관장하게 맡겼다" 이를 보면, 전장터에서 싸워야할 장수가 한 여인을 제지하기 위하여 후방으로 빼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유비가 얼마나 손상향을 경계했는지 알 수 있다. <<삼국지. 법정전>>에서는 이런 제갈량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주공은 공안에 있다. 북으로는 조조가 강성한 것을 우려하고, 동으로는 손권의 핍박을 걱정한다. 가까이는 손부인이 겨드랑이 안에서 변괴를 일으킬까봐 우려한다" 이 기록을 분석해 보면, 유비와 손상향의 밀월기는 일찌감치 지나간 것같다. 이외에 <<원화군현지>>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손부인성은 잔릉(孱陵)성 동쪽 5리에 있다. 한소열부인(손권의 누이이다)이 소열과 서로 의심하여, 이곳에 성을 쌓고 살았다" 즉, 유비가 익주로 들어가기 전에, 두 사람은 이미 감정이 결렬되어 서로 다른 곳에 살았다는 말이다.


7. 손상향은 언제 동오로 돌아갔는가?

손상향이 언제 동오로 돌아갔는지에 대하여 사료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록이 있다.

제일설: <<자치통감>>의 시간으로, 건안16년(211년) 12월이라는 것이다: "손권은 유비가 서쪽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배를 보내어 누이를 맞았다; 부인은 유비의 아들 선을 데리고 오로 돌아가려고 했다. 장비, 조운이 병사를 데리고 강을 막아, 유선을 돌려받았다" 이 사료의 출처는 <<삼국지. 조운전>>에서 주석으로 인용한 <<운별전>>이다. 이것은 또한 삼국연의에서 조자룡이 강을 막고 아두를 되찾아오다라는 이야기의 원형이기도 하다.

제이설: 건안20년(215년)경이라는 것이다.  근거는 <<삼국지. 이주비자전>>과 <<화양국지. 유선주지>>이다. 전자에는 "선주가 익주를 안정시키고, 손부인이 오나라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고, 후자에도 비슷하게 익주를 얻은 후에 제갈량이 권해서 손부인을 오나라로 돌려보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자면, 손상향은 215년경에 오나라로 돌아간 것이 된다.

어느 시간이 보다 정확한 것일까? <<삼국지집해>>에서는 왕담의 주장을 들어, 제이설의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서는 동오로 돌려보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법정이 이미 유모의 처 오씨를 궁중에 들였다. 당시는 건안 20년 을미로, 마침 손권이 장사를 빼앗아 경계를 쳐들어와서 연합이 결렬되려는 때였다. 이로써 볼 때, 유비와 손상향은 7년을 함께 살았다"

왕담에 따르면, 손상향이 돌아간 것이, 범정이 유모의 처 오씨를 궁중에 들였다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이를 기화로 손상향을 핍박해서 동오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유모의 처인 오씨가 궁중에 들어와서 정실부인이 되었다면 당당한 동오의 손상향으로써 어찌 참고 있을 수 있겠는가? 친정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러한 가능성이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제일설의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본다. 손부인의 성격으로 유비와는 잘 맞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녀가 오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동오로 되돌아갔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 문제도 논쟁을 오래 하였지만, 현재까지 정론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