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경덕(徐敬德)과 황진이(黃眞伊)의 사랑이야기

2022. 12. 17. 19:54카테고리 없음

🟢 서경덕(徐敬德)과 황진이(黃眞伊)의 사랑이야기

황진이(黃眞伊). 그녀는 조선 중종 때의 송도(松都, 지금의 개성) 기생이다.
정사(正史)에 기록된 것이 없으니 당연히 그녀의 정확한 생몰년대는 모른다.
다만 여러 야사에 전하는 내용들을 종합하여 추정해 보면 중종 6년경에 태어나 중종 36-7년경에 죽었으니,
미인단명(美人短命)이란 말이 있듯이 그 나이는 겨우 30세 전후이다.
여러 야사에 전하는 황진이의 삶 중에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지족선사(知足禪師)와의 관계, 그리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의 사랑 이야기이다.

지족선사. 당시 송도 인근에는 아주 유명한 스님이었다.
면벽 10년의 묵언수행(默言修行).
그는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벽만을 바라보며 반쯤 감은 눈을 아래로 깔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수행하기를 10년.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을 그는 오로지 벽을 향하여 앉아 한 마디 말도 않은 채 정말이지 장승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송도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던 황진이도 그의 명성을 들었다.

요즘처럼 비가 오락가락하는 여름날. 황진이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왕실의 종친이라는 유학자 벽계수도 무너뜨린 그녀가 아닌가.
그녀는 홀로 지족선사가 수행하고 있다는 굴을 찾아간다.
마침 비가 내려 흠뻑 비에 젖었다. 겉옷을 벗어 들었다.
하얀 속옷 치마 저고리. 비에 젖은 옷은 그녀의 몸매를, 아니 알몸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벽을 향하여 앉은 지족의 옆에 살며시 다가간 황진이.
(이 부분을 가장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는 소설이 최인호의 <황진이이다)
결국 '끙'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지족은 황진이의 품에 무너져 내리고, 이 때 생긴 말이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다.

다음은 서경덕. 조선 중종 때의 유명한 도학자이다.
1489년에 태어난 그는 18세 때에 <대학 >을 배우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명확히 함, 혹은 자기 마음을 바로잡고 선천적인 좋은 지식을 갈고 닦음)'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원리에 의지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과거 시험에는 뜻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명령으로 사마시(司馬試 생원과 진사를 뽑는 작은 규모의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했을 뿐 벼슬살이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로지 도학에만 전념하였다.
집은 극히 가난하여 며칠 동안 굶주려도 태연자약하였으며, 제자들의 학문이 진취된 것을 볼 때에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평생을 산림 속에 은거하여 산 것을 볼 때에는 세상에 대한 뜻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정치의 잘못을 들을 때에는 개탄함을 금하지 못해 임금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비판했다고 한다.

이 서경덕이 바로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을 때였다.
자연히 그의 인물됨이 인근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들은 모양이었다.
벽계수와 지족을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황진이는 서경덕에게도 도전을 한 모양이었다.
지족에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서경덕에게 옮겼다.
하얀 속치마 저고리, 그 위에 흘러내린 비.
비에 젖은 하얀 비단 속옷이 알몸에 밀착되어 가뜩이나 요염한 기녀의 몸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차림으로 계속 비를 맞으며 서경덕이 은거하고 있던 초당으로 들어갔다.
물론 서경덕 혼자 있는 집이었다.

그러나 서경덕은 지족과 달랐던 모양이었다.
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은 오히려 황진이를 반갑게 맞이했고,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아예 황진이의 옷을 홀딱 벗긴 모양이었다.
옷을 벗기고는 직접 물기를 닦아주는 서경덕의 자세에 오히려 황진이가 부끄러울 판이었다.

그래도 황진이는 "저도 사내인 것을……" 하며 은근히 오기를 가졌던 모양이었다.
황진이의 몸에서 물기를 다 닦아낸 서경덕은 마른 이부자리를 펴 황진이를 눕히고는 몸을 말리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꼿꼿한 자세로 글읽기를 계속했다. 날은 어두워졌고 이윽고 밤이 깊었다.
황진이가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삼경쯤 되자 이윽고 서경덕이 황진이 옆에 누웠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이내 가볍게 코까지 골며 편안하게 꿈나라로 가버리는 서경덕.
아침에 황진이가 눈을 떴을 때 서경덕은 이미 일어나 밥까지 차린 모양이었다.
대충 말린 옷을 입고는 부끄러워서라도 황진이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며칠 후. 황진이는 성거산을 다시 찾았다.
물론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음식을 장만하여 서경덕을 찾아갔다.
역시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이 이번에도 반갑게 맞았고, 방 안에 들어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달라는 뜻을 밝혔다.
빙그레 웃는 서경덕. 이 후의 일은 상상을 할 수 있다.
어느 야사에도 서경덕이 황진이와 놀아났다는 기록은 없다.
둘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흠모 혹은 존경이라는 단어뿐이다.

황진이가 문득 서경덕에게 이렇게 말했다.
<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사옵니다.>
서경덕이 황진이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째가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이십니다.>
서경덕이 미소를 지으며 셋째를 물었다. <바로 저올시다.>
송도에 있는 것 중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세 가지 혹은 가장 뛰어난 세 가지.
송도삼절(松都三絶)은 그렇게 황진이의 입을 통해 만들어졌다.
서경덕도 동감이나 하는 듯이 소리없는 미소만 지었다고 한다.

서경덕이 아무리 도학자이고 뛰어난 사상가라고는 하나 당시의 신분으로 보면 양반이요, 그도 역시 사내다. 그러니 당연히 결혼을 했고 첩까지 두었다.
그리고 여자를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와의 관계는 왜 그렇게 아름답고 순수했을까.
이는 황진이도 마찬가지였다.
서경덕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는 스승을 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로지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지 사내로서의 서경덕이 아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성거산에 은거하여 살던 서경덕이 가끔은 황진이를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그가 남긴 시조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마음이 어린 후(後)ㅣ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내 님 오리마난, 지난 닙 부난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마음이 어리석고 보니 하는 일마다 모두 어리석다
만겹으로 구름이 둘러싸인 성거산에 어느 누가 나를 찾아오겠는가
그런데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소리를 듣고
혹시 그녀가 왔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열어본다.)

마음이 어리석고 보니 하는 일마다 모두 어리석다,
만겹으로 구름이 둘러싸인 성거산에 어느 누가 나를 찾아오겠는가,
그런데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소리를 듣고 혹시 그녀가 왔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열어본다. 대충 그런 뜻이다.
조선조의 벼슬아치나 유학자들이 임금을 생각하며 일반적으로 부르는 님이 아니다.
서경덕의 시조에서는 분명 여인을 그리는 남자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현상이다.
서경덕이 이 시조를 부를 때에 누군가가(마당을 쓸던 하인일 수도 있고, 제자일 수도 있다) 들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