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7. 00:44ㆍ카테고리 없음
⚫️ 진시황(秦始皇) 이야기 3
4. 치도(馳道)의 건설
치도에 대해서는 진(秦)나라가 멸망하고 30년이 채 되지 않은 무렵 한(漢)나라의 문제(文帝) 시대의 가산(賈山)이란 사람이 글을 남겼다. 그것이 도폭은 50보(步)였다고 한다. '보(步)란 길이의 단위이며, 1보는 지금의 1.35m 정도이며, 50보의 폭이면 67m 정도이다. 그리고 3장(丈)마다(당시의 1장은 2.25m이며, 3장은 6~7m) 수목이 심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이 동원되어 도로가 만들어지고, 그 도로가 비에의해 유실되면 보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관리가 파견되어 오면 그 관리의 식량이나 주거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역(驛)에는 말을 비치하여 그 말을 사육하는 것도 모두 그 지역 백성들의 일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고통이 대단했다고 한다. 한(漢)나라 때 다시 길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으나 이것을 간(諫)한 사람이 가산(賈山)이다. 가산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길을 개척했으니 다시 만들 필요가 없으며 진나라는 그 때문에 멸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황제가 죽자 갑자기 나라가 멸망한 것은 도로 건설로 시달렸던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 때문이며 한나라는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진나라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그 당시는 시황제가 만들었던 길이 남아 있었다. 치도는 정말 훌륭한 도로였다. 폭이 67m, 그리고 6m마다 큰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구원(九原), 만리장성 근처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황해 연안까지, 남쪽은 양자강(揚子江)에 이르기까지 길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어느곳이든지 하나의 수레로 갈 수 있게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까지 가려면, 한(韓)나라에서 수레를 바꾸어 타고, 위(魏)나라에서도 바꾸어 타야만 했다. 그외에도 곳곳에서 바꾸어 타야 했지만 진시황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번거로움이 없어졌고 한 대의 수레로 전국 방방곡곡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도로로 인해 각지의 교역(交易)이 번창하게 되었고 산업경제가 활성화되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
5. 도량형(度量衡)의 통일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도 아주 중요하다. 한 홉[合], 한 되[升], 한 말[斗]이라든가, 길이의 단위인 보(步), 장(丈) 등이 각국에서 약간씩 달랐다. 되나 말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 어느 나라에서는 한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전국의 도량형을 엄격히 통일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바로 그 해에 실시되었다. 한 홉이라는 표준 용기를 제작하여, 전국에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중앙에서 보내온 한 홉짜리 용기가 동북 지방 근처에서 출토(出土)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전국에 배당되었던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업과 경제가 발달했다. 이제까지는 각지에서 다시 하나하나 환산해야만 했던 것이 그러한 수고를 면하게 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秦)의 화폐가 전국에서 통용되었다.
6. 절대자 시황제(始皇帝)
시황제는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천하통일 같은 것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누구나 신선을 믿고 있었다. 시황제도 믿고 있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황제'라는 말 그자체가 그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칭호였다. 또 그때까지 누구나 다 쓰고 있던 '짐(朕)'이라는 말을 황제 외에는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등 황제의 절대화를 도모했다. 황제의 절대화는 국가를 운영해 가는데 필요한 것이었지만 시황제는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천하통일의 대사업을 완수한 자신은 보통인간이 아니며 절대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절대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로불사의 인간, 즉 신이나 선인과 같은 존재이다. 스스로를 절대자라고 자임했던 시황제는 이제 자기 자신이 선인(仙人)이 되겠다,신선(神仙) 되겠다고 원하게 되었다. 신선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시황제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았는데 도사(당시는 방사(方士)라고 불렀다)가 여러 가지로 수상한 짓을 가르쳐 주었다. 예컨대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모습을 너무 보여 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인주(人主)는 미행(微行) 하여 체중(體中)의 사기(邪氣)를 피(避)하라.'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사기(邪氣)가 몸에 들어와서 신기(神氣;몸 속에 있는 신의 기운)에 해가 된다고 해서 시황제에게 당분간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말했다. 더구나 자신이 있는 곳을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도록 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거처가 알려지고 말았다. 시황제는 매우 노하여 누가 알렸느냐고 조사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그 때 곁에 있던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기(史記)>에는 아니지만 다른 사료 등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 의하면 금릉(金陵;지금의 남경)에 갔을 때 역시 방사(方士)였겠지만 '이 근방에는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왕기' 즉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은 그 지방에서 왕이 나온다는 것이다. 왕은 나 혼자면 충분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자기를 대신하는 자가 이 지방에서 나올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지방의 기맥에 의한 것이므로 기맥을 단절해야겠다고 시황제는 산을 파서 무너뜨렸다. '연강굴단(連岡掘斷;연속되어 있는 언덕을 잘라 버림)'해 버리면 왕기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장소는 진회(秦淮)라고 일컬어지며 지금도 남아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수로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리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그것은 인공의 하천이 아니고 자연의 하천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생긴 것은 역시 시황제의 인품에 의한 것이리라.
소주(蘇州)에 호구(虎丘)라는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춘추시대 오(吳)나라 왕의 무덤이 있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명검이 많이 나왔던 곳으로 왕이 사망하면 검을 무덤 속에 넣었다. 그런 명검이 몇 천 개나 있다고 들은 시황제가 그곳을 파헤치게 했다는 것이다. 파헤친 자리가 검지(劍池)라는 곳이다. 파 보았지만 범이 나타나서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파헤치려 했던 곳에 범이 있어서 검으로 바위를 쳤던 그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설명서에 쓰여 있기도 한다. 검을 차지하려 했던 것 역시 검이 갖는 영력이 탐이 나서 그랬을 것으로 생각된다.
7. 진시황의 출생
대상인이었던 여불위는 교묘한 정치공작을 펴서 진나라의 서출공자 자초의 후원자가 된다. 결국 기원전 249년 자초를 진나라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렇듯 진왕 정은 여불위와 자초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자초가 어느날 여불위에 집에 초대되었는데, 여불위의 애첩을 보고 반해서 자신에게 달라고 하였다. 여불위는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일을 앞두고 작은일을 양보하자는 심정으로 자초에게 재가 시킨다. 후에 그녀는 자초사이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정(政)이며, 이 정이야말로 6국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으며 뒤에 호랑(虎狼)이라 불리운 진시황이었던 것이다.
8. 진시황의 꿈
겨우 열세살의 나이에 왕이된 진시황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드디어 천하를 평정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가를 건설하였다. 진시황은 자신의 크나큰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 제왕이라는 호칭을 새롭게 바꾸길 원했다. 따라서 신하들과의 논의 끝에 "태황의 황과 오제의 제"를 따서 황제(皇帝)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진시황은 자신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시황제(始皇帝)라고 부르기도 하고, 후대에는 2세, 3세등으로하여 이를 천만세까지 이어 나가도록 하자는 원대한 꿈을 품었지만, 겨우 2세에 이르러 멸망당해 15년의 짧은 왕조로 끝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