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시황(秦始皇) 이야기 2

2022. 12. 16. 06:47카테고리 없음

⚫️ 진시황(秦始皇) 이야기 2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그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二世(이세)나 三世(삼세)는 물론 萬世(만세)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 始皇帝(시황제)라 칭했다. 또한 전국을 하나의 통치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郡縣(군현)제도를 실시했다. 황제를 정점으로 西周(서주)(기원전 1122-1771)시대의 봉건체제를 대신하게 됐다. 이후 중국은 2천년 이상 군현재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그의 不老長生(불로장생)에 대한 집착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영원하기를 원하듯, 통일제국이 영구히 존속하도록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집념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한후 얼마 못되어, 진제국의 長壽(장수)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왜 진이 이렇듯 단명하고 말았는가 ? 우리선 통일과업을 완성시킨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뒤를 이었던 泰二世(태이세)황제는 정통성 시비에 말려들기도 했다.

더욱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은 탄생했지만, 아직도 봉건제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세월을 거쳐 중국은 봉건적인 정치질서에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전환해왔다. 또한 통일후 진은 전국시내에 서울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지배층 1만호를 강제로 수도 咸陽(함양)으로 이주시켜,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제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결국 진제국 말기 지방 토호와 6국의 귀족세력이 전국각지에서 봉기하여 진왕조를 전복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된 무리한 토목공사도 진의 단명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인공위성에서 욱안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1만2천7백리의 만리장성, 사치의 상징으로 거명되는 길이 6백90m, 폭 1백14m의 아방궁, 무수한 호화유적을 남긴 진시황제 무덤(높이 약 70여m, 동서 약 6백m, 남북 2뱍여m), 그 외에도 무수한 건축물이 조성됐다. 당연히 이를 위해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통일된 후에는 세부담이 무려 20배로 늘었다고 백성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국토나 도량형, 문자 따위의 통일 뿐 아니라 사상의 통일까지 이루려고 했던 진은 결국 「통일작업」의 무리한 추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단명을 초래했다. 焚書坑儒(분서갱유)애 말로 사상통제가 낳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모두 4백60여명의 선비를 생체로 매장하여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식인들을 단숨에 제거했다. 또한 진나라 외에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는 물론, 농업등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책을 체외하고 거의 모두 책을 불사르는 문명파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는 지식분자, 특히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중국은 물로 동양문화 전체에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업되는 최초의 선례가 됐던 셈이다. 이로 말미암아 동양인은 전통적으로 획일적인 사고에 길들여졌으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인은 물론 동양인 전체가 다원화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진통을 겼고 있다.

진시황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괴물(怪物)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현재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중국(中國)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전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중국이라는 단어는 단지 '나라의 중앙' 또는 '수도'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대륙 통일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같은 나라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대륙의 사람들에게 생겨났다. 그로 인해 삼국(三國) 분립시대나 남북조((南北) 분열시대의 중국인들은 '이것은 이상사태(異常事態)다. 언젠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던 것이다. 창작으로 가공할 괴물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대사업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1.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쓰다

'황제' 라는 말은 영어로 emperor라고 한다. emperor는 로마 제국의 황제 emperialt에서 유래된 말이나 '皇帝' 라는 두 개의 한자로 칭호를 최초로 쓴 사람은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  시황제의 시대, '전국칠웅(戰國七雄;중국 전국시대의 일곱 제후)' 이라고 해서 중국에는 일곱 개의 강국이 있었고, 진(秦)은 그 중의 한 나라였다.시황제는 나머지 여섯 개 나라를 잇따라 멸망시켰는데 BC 221년에 최후까지 남아 있던 산동(山東) 반도의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비로소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진시황은 태황의 태(泰)를 떼어내고 황(皇)만을 취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오제(五帝)에서 제(帝)를 택해서 '황제'로 칭하기로 했던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란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것으로 삼황(三皇)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복희(伏羲)씨, 여와(女蝸)씨, 신농(神農)씨 세 사람의 지도자를 말한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 왕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 왕으로 전해진다. 오제(五帝)는 황제, 전욱, 곡, 요, 순이라는 다섯 사람의 성군을 가리킨다.  따라서 '황제'라는 말에는 진시황 자신이 3황 5제의 덕을 겸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2. 동문(同文)--문자의 통일

진시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제정했는데, 그 중에서도 누구의 생각에나 쉽게 떠오르는 것은 '동문(同文;문(文)을 같이 하는 것)' 즉 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다.  전국시대의 7웅은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었다. 그 근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자체(字體)가 달랐고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소전(小篆)이란 글자의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을 폐지시켰다.

그 폐지된 문자를 육국문자(六國文字)라고 부른다. 이 육국문자는 분서(焚書;죽간(竹簡)등의 책을 불태운 사건)으로 소멸되었다. 진시황제의 사후에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으로 들어왔을 때 문서들을 버렸기 때문에 사료(史料)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그러나 가끔 지하에서 특히 사막에서 출토되는 인장에서 이 육국문자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인장이 돌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그 당시는 모두 금속을 썼다. 훌륭한 사람은 금, 그 다음 사람은 은이나 구리를 썼다. 이것을 끈으로 매서 목에 걸었다.  

전생시에는 이것이 인식표(認識票) 역할을 했다. 전사한 유체(遺體)를 판별할 수 없을 때에는 목에 걸었거나, 혹은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금속의 인장에 의해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 인장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국문자 즉 진시황제에 의해서 폐지되었던 문자였던 것이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국토통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참된 뜻으로의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3. 동궤(同軌)-차륜(車輪) 폭의 통일

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또하나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궤(軌)를 같이 한다)' 즉 바퀴 폭의 통일이다. 당시 각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해 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가 통일된 것이다. 바퀴자국의 차이는 전국적인 교통의 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긴 시황제는 전국에 '치도(馳道)'라는 도로를 만들고 차륜의 폭을 통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