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을 뒤흔든 女人 또 하나의 권력자 ‘태후’들 (9) - 요나라 소작(蕭綽)

2022. 12. 14. 04:52카테고리 없음

🟢 중국을 뒤흔든 女人 또 하나의 권력자 ‘태후’들 (9) - 요나라 소작(蕭綽)


권력, 사랑, 가정을 모두 가진 여인 -  요나라 소작(蕭綽)

예지황후(睿智皇后, 953~1009)는 거란 5대 황제 경종 의 부인이자, 거란 6대 황제 성종 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이름은 소작(蕭綽)으로, 아아극(雅雅克)으로 기록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연연(燕燕)으로도 불리었다. 그녀의 자는 염염(炎炎)이다. 그녀는 아들 성종의 섭정을 하였는데, 성종은 그녀에게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라는 존칭을 내렸다. 이후 그녀는 승천태후 또는 그녀의 성인 '소' 를 따서 소태후(蕭太后)라고 불렸다.

그녀가 성종을 섭정한 시기를 ‘승천후섭정시기’라고도 부른다. 또한 그녀는 한족이었다가 거란에 투항하여 대승상의 자리까지 오른 야율융운 과 내연 관계였다는 일설이 있다. 소태후가 역사상에 등장하는 모습은 거란 을 발전시킨 현명하고 대의에 밝은 여걸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남편 경종이 몸이 허약하여 경종이 황위에 있던 시기에도 중요한 국사를 주로 처리하였다.

이후 아들 성종이 황위에 오르자 12세의 그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섭정기간에 법전을 편찬해 공포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불경을 편수하여 불교문화를 발전시켰다.

또 993년 소손녕 에게 고려를 침략케 하여 고려와 거란의 1차 전쟁을 일으키게 했으며, 1004년 송나라와 직접 전쟁을 하여 거란에 유리한 화약을 맺었다. 이를 전연의맹(澶淵之盟)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후로 송 은 거란에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세폐로 바친다.

이후, 거란은 그를 기반으로 재정을 닦고, 송과의 무역도 활성화되었다. 거란이 거대한 정복왕조로 대제국을 이루고, 성종 때 전성기를 이룩하기 위한 기반을 닦은 여인으로 평가된다.

❋ 야사 뒷 이야기
소작은 깊은 밤 침소로 한덕양(韓德讓)을 극비리에 불렀다. 한덕양은 갑작스런 소작의 부름에 겁이 덜컥 났다. 최근의 앞 뒤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 봐도 책잡힐 일이 없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며칠 전 진왕(晉王)으로 봉해짐과 동시에 융운(融運)과 야율덕창(耶律德昌)이란 이름까지 하사 받은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어서 오세요. 진왕! 밤늦게 오시라 해서 미안해요.”

소작은 방문 밖까지 나와 진왕을 맞았다. 그리고는 한덕양을 상석에 앉히고 넙죽 절을 하며

“소저 18년 전의 일을 사과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진왕을 저의 실질적 낭군으로 모시겠습니다.”

라고 약혼식에서 나누어 가진
옥(玉)가락지를 앞에 내어 놓았다.
사실 한덕양도 소작과의 약혼식을 치른 후 한달 후면 결혼식을 하고 정식 부부로 꿀 같은 신혼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경종이 소작을 도둑질해 감으로써 오늘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한덕양은 얼떨결에 절을 받기는 했으나 안절부절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진왕 그렇게 어려워 할 것 없어요. 소저는 한공자(公子)와 강제로 헤어진 후 한시도 공자를 잊어본 적이 없어요. 공자는 소저와 헤어진 후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요?”

“한공자 지금 이 자리는 18년 전의 우리입니다. 이 술 한잔 받으세요. 이 술이 대국주(大麴酒)인데 중국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5대 명주 중 하나지요. 소저는 거란족이지만 한족을 존경합니다.”

소작은 술잔을 재촉했다. 한덕양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소작에게 술작을 넘겼다. 안주도 먹을 사이 없이 몇 잔의 술이 오가자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난 세월을 아쉬워 했다.

“진왕…!”

여인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사내의 품에 몸을 맡겼다. 사내도 안겨오는 여인을 처음엔 석남(石男)같이 덤덤하게 맞다가 뜨거운 열기가 전이되자 서둘러
쓸어안았다.

“소저가 공자를 얼마나 사모했는지 공자는 알고 계십니까?”

소작은 경종과 결혼을 해 4남 3녀를 낳았으나 후사를 이을 생산기지 역할만을 했을 뿐 애틋한 부부생활은 하지 못했다. 이제 미망인이 되어 첫사랑을 만나 18년 전으로 돌아가 한 덩어리가 되니 몸은 용광로가 되어 삽시간에 사내를 용해시키고 말았다.

경종은 죽기 몇 달 전에 소작에게 짐(朕)과 여(予)를 스스로 쓸 수 있게 정식으로 허락했다.

이로서 소작은 비록 정식 황제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황제의 역할을 할 길이 열렸다. 이같이 자신이 쓰던 짐과 여의 칭호를 소작에게 넘겨주고 황음으로 살다 35세에 요나라의 미인 아니 중원대륙의 최고 미인을 남겨두고 세상을 떴다.

송나라와 국경분쟁으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으나 아들 성종(聖宗 982~1031)이 등극하고 부터는 정국이 안정되어 소작은 옛 약혼남과 밀회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국모가 되어 궁궐에서 허우대 좋은 무수한 남정네들을 보아 왔으나 그때는 그들이 그림의 떡이었으나 이제는 그림의 떡을 손안의 떡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것도 배고프고 허기가 졌었던 것까지도 찾아서 먹으려는 욕심이 발동하고 있다. 성종 나이 이제 겨우 12세로 소작이 일일이 섭정을 하고 있으나 병권은 연인 한덕양에게 맡기고 여인으로 돌아가 사랑의 정원에 피곤한 날개를 접었다.

넷째 아들은 일찍 여위고 3남 3녀가 모두 국정에 참여해 튼튼한 성(城)이 되어 요나라는 건국 이래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소작으로 금상첨화는 옛 약혼자 한덕양을 병마대원수에 임명해 국경을 수시로 순찰할 때 미행으로 못다 한 사랑을 불태울 수 있어 하루하루가 금쪽 같이 아까운 것이다.

한덕양 역시 병마대원수가 됐으나 소작의 세 아들과 세 사위가 철통같은 방위를 하고 있어 초순 중순 하순 한 달에 3번 정도 국경수비대를 순찰하는 것이 군무(軍務)의 전부였다. 이처럼 3번 순찰을 나아가는 것도 소작과 밀월여행을 하기 위함이다.

문무백관들이 나이 어리나 성종의 사려 깊은 언행 뒤엔 실세 소작이 있음을 알고 있어 그들은 요나라의
측천무후(628~705)라고까지 불렀다.

"4월 10일 남쪽에 복사꽃이 만발" 한덕양에 날아든 소작의 편지다. 송나라와 국경을 하고 있는 둘째아들이 왕으로 있는 지역을 순찰 나가자는 통보다. 한덕양도 1년 전에 상처를 하고 홀아비 신세라 소작과 국경 순찰이 목마르게 기다려지는 처지다. 한번 순찰을 나아가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열흘이 걸려 사실상 한달 내내 순찰 길이다. 한덕양은 신바람이 났다. 순찰 길에선 승천 황태후(소작)와 병마대원수가 아닌 소작과 한덕양이 되어 뜨거운 사랑을 마음껏 나눌 수 있어 그들은 순찰행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차남 야율융경(耶律隆慶)의 성에 도착하자마자 온천을 하고 몇 잔의 술에 주선(酒仙)인 그녀가 벌써 18년 전으로 돌아갔다. 장검을 휘두르며 초원을 누볐던 철의 여장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힘드셨지요? 이 술을 한잔 더 드세요. 이 샨냥주는 우리나라에선 아주 귀한 술이예요. 당신의 나라에서도 흔치않은 술이지만 이곳에선 명주중 명주예요. 제가 순찰 나올 때마다 한 병씩가지고 올께요. 어서 한잔 하시고 저도 한잔 주세요."

한덕양은 술잔을 받아 단숨에 마시고 술을 가득 따라 소작에게 건넸다.

성종 등극 후 비록 어머니가 섭정을 했으나 나라는 태평성대로 전국에선 격양가(擊壤歌)가 끊이지 않았고, 소작은 옛 약혼자와 후회 없는 사랑을 나누다 1009년 12월 57세로 먼저 간 남편을 따라갔다. 성종은 소작에게 성신선현황후로 추존했다 다시 예지황후로 추존해 그의 슬픔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