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의 여인들 6 - 2 조조를 감복시킨 妓女 출신 변 황후

2022. 12. 10. 06:48카테고리 없음

🟢 삼국지의 여인들 6 - 2 조조를 감복시킨 妓女 출신 변 황후

글 : 민희식 前 서울대 교수
그림 : 유승배


미부인은 공자 아두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갑자기 근처의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조조(曹操)는 건안(建安) 초(196년) 정부인(丁夫人)을 폐하고 첩이었던 변(卞)씨를 정처(正妻)로 삼는다. 정부인이 키우던 조조의 맏아들 조앙(曹昻)이 장수(張繡)와의 전투에서 조조를 보필하다 죽자 조조를 원망하여 둘 사이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정처가 된 변씨는 조조의 두 아들을 키우며 그녀 자신 또한 조비(曹丕), 조창(曹彰), 조식(曹植), 조웅(曹熊) 네 아들을 낳는다.

그녀는 기녀(妓女) 출신으로, 조조가 25세에 한창 관운이 트일 때 첩으로 삼은 여자였다. 그녀는, 조조가 도주 중 동탁(董卓)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원술(袁術)로부터 듣고 조조의 측근과 장수들이 흩어지려 하자 소문에 불과하다며 이를 말린 적이 있었다. 후에 조조는 자신의 부하들이 건재한 걸 보고 변씨가 보통 여인이 아님을 알게 된다.

변 황후(卞皇后)는 기녀 출신이지만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를 놓은 의상을 입지 않고 보석을 몸에 달지 않았다. 식기도 검은 칠 바른 질박한 것을 사용하였다. 조조가 멋진 보석, 목걸이, 귀걸이를 갖고 와 맘에 드는 것을 택하라고 하자 손을 대려 하지 않았고, 거듭 청하면 마지못해 기껏 중품 이하의 물건만을 받았다. 조조가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상품의 물건을 고르는 것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 하는 짓이고 너무 하품의 물건을 고르면 천하게 보이지요. 그래서 항상 중 정도의 물건을 고릅니다.”

또 그녀는 친척이 찾아오면 반기지 않고 “윗사람의 은혜를 입으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타일렀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가 조조의 마음에 들었으며 그의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조조는 언제나 변 황후를 높이 평가하였다. 기녀 출신이라고 업신여기는 사람도 많았으나 그녀의 과거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조조가, 부하의 출신 성분보다는 유능한 면을 중요시하는 태도는 바로 그녀에게서 배운 것이다. 현처(賢妻)형의 영민한 여인, 조조의 부인이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었다. 그녀가 낳은 조비가 정식으로 조조의 후계자로 정해지자 궁녀들이 몰려와 축하하였다.

“이번에 아드님께서 태자(太子)가 되시니 천하 만인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변 황후는 “아, 여러분. 내 아들은 나이가 되어 후계자가 된 것뿐입니다. 나의 교육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오직 나이 때문에 후계자가 된 것이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당연한 것입니다. 나는 기쁘다기보다 그저 마음이 편할 뿐입니다”하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만족했다.

궁녀들의 입을 통해 부인의 이러한 언행을 여러 차례 전해들은 조조는 ‘화가 날 때 노기를 곁에 드러내지 않고 기쁠 때에도 자기의 위치를 잃지 않는 그 태도야말로 나의 스승이다. 나도 그 태도를 본떠 언행을 한다면 큰 실수가 없을 것이다’하고 생각하였다.

궁녀나 재상들이 제아무리 축하를 해도 그저 미소를 지을 뿐 평정심을 조금도 잃지 않는 그녀. 이처럼 어느 때나 부인이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자기를 대해준 것, 이것이 조조로 하여금 여러 면에서 인생의 성공을 가능케 하였다. 부인의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그의 전술적인 능력과 시적(詩的)인 능력이 크게 자라나고 인간다운 멋진 풍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

조조는 《삼국지》 안에서도 인물 중의 인물일 뿐 아니라 그의 일곱 자식도 변 황후의 개성을 본받아 조조와 더불어 뛰어난 시인이 되었다. 조조의 시적 천재성에 대해서 잠시 보기로 하자.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조조의 시 30여 편은 그 특징상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정치가로서의 이상을 순수하게 토로한 것이다.

• 단가행(短歌行)

對酒當歌
人生幾何
譬如朝露
去日苦多
술 마시며 노래하자
인생은 무엇인가
비유컨대 아침 이슬과 같도다
지나간 나날은 고통도 많구나

(중략)

山不厭高
海不厭深
周公吐哺
天下歸心

산은 흙을 쌓아 높아지고
바다는 물을 받아 깊어진다
옛날의 주공처럼 인재를 맞이한다면
천하의 민심이 돌아오리라

이 단가행(短歌行)은 조조의 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다. 조조는 자기를 배반한 자나 큰 죄를 지은 자라도 유능하기만 하면 맞아들여 환대하였다. 그는 잠자리를 찾아 헤매는 새처럼 인재를 구하였다.

둘째로 신선(神仙)에 대한 동경을 그린 시가 있다.

• 정렬(精列)

厥初生
造化之陶物
莫不有終期

생명은 원래
조물주가 빚어낸 것으로
종말의 시기가 있다

(중략)

君子以弗憂
年之暮奈何
時過時來微

군자는 근심 않으리
세월이 다함을 어찌하랴
쉬지 않고 시간은 가 남은 날 많지 않으리

중국에는 전국시대 장강 하류에서 태어난 가요를 중심으로 한 초사(楚辭) 이래 신선 세계에의 동경을 시로 노래하는 전통이 있다. 그 공통된 내용은 현세의 고뇌와 인생의 허무를 탄식하는 데서 시작하여 선인(仙人)을 만나 불로장생의 약을 얻고 선인이 되는 것이 줄거리다. 선인이 되는 자도 있고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실망하는 자도 있다. 조조는 현실적 정치가였지만 신선술에 대한 관심 또한 컸다. 고뇌의 현실은 선계에의 동경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현실에의 회귀로 이어진다.

셋째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에 관한 시다.

조조의 시들은 서민적 발상, 보편적 표현으로 인간의 비애를 마음속 깊이 호소한다. 조조가 원소(袁紹)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태행산(太行山)을 넘을 때, 추위와 싸우며 행군한 체험시(혹자는 조비가 쓴 것이라고도 하지만)를 보기로 하자.

• 고한행(苦寒行)

北上太行山
艱哉何巍巍
羊腸阪詰屈
車輪爲之摧
樹木何蕭瑟
北風聲正悲

북쪽 태행산에 오르면
몹시도 험한 절벽
언덕길 워낙 꾸불꾸불해
마차바퀴 부러져 깨진다
길가의 나무 소슬하고
북풍 소리 서글프다

(중략)

行行日已遠
人馬同時飢
擔囊行取薪
斧冰持作糜
悲彼東山詩
悠悠令我哀

행군길 멀기만 한데
사람도 말도 함께 굶주려
짐을 메고 땔감을 찾아
얼음을 깨고 죽을 끓인다
슬프도다. 동산의 시
그 절실함 어찌 다 말하랴

조조는 이 동산(東山)의 시를 빌려서 부하 장병의 고충을 위로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험한 산길을 헤매는 병사의 고통,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이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한다. 조조를 냉혹한 권력자, 무자비한 지배자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실은 자신의 삶에 고통을 느끼고 주변의 불행한 자를 그는 동정하였다. 조조는 타산가라기보다 남의 고뇌의 이해자라고 할 만하다.

조비는 그의 문선(文選)에서 ‘문장경국지대업(文章經國之大業), 문장은 나라를 바로잡는 대의(大義)이며 불후(不朽)의 사업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으며 영화환락(榮華歡樂)은 일대(一代)뿐이다. 언제고 사라지게 될 운명이니 문장이 지니고 있는 영원무궁의 생명에는 미치지 못한다.

문학의 독립성과 영원성을 밝힌 이 말은 예술지상주의가 성한 육조문학(六朝文學)의 개막을 알리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조조와 조비의 막하에 초대되어 문장을 쓰고 학문과 문학을 즐겼으니 조조 중심의 문학살롱이 형성되었다. 조조, 조비, 조식이 미친 문학상의 영향은 매우 크다. 제위에 오른 조비가 동생 조식을 시기한 나머지, 내 눈 앞에서 일곱 걸음 걷는 사이에 시를 지으라고 명하고 못 지으면 책임을 묻겠다고 위협한 비극적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조비의 시는 남아 있지 않고 조식의 시는 《조자건집(曹子建集)》에 100여 편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