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의 여인들 6 - 1 조조의 마음을 사로잡은 채염의 노래

2022. 12. 10. 06:39카테고리 없음

🟢 삼국지의 여인들 6 - 1 조조의 마음을 사로잡은 채염의 노래

● 피리 부는 여인 채염(蔡琰)과 조조

• 평범하지 않은 조조의 기질

조조는 어린 시절에는 방탕아였다. 공부는 별로 하지 않고 요령을 부리며 남을 속이는 걸 재미있어 하기도 했다. 청년시절에는 유명한 인물 감정가 허소(許劭)에게 자신을 평해 달라고 부탁하여, ‘치세(治世)의 능신, 난세(亂世)의 간웅’이라는 유명한 평을 들었다. 조조는 이 평을 듣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조조의 담대한 성격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조조는 20세 때 효렴의 천거를 받아 낙양의 경비를 맡았다. 황건적 토벌의 공로로 황궁의 금위군 통솔자인 기도위가 되고 이후 전군교위를 역임한다.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자 반동탁연합군을 결성한 조조는,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한 후 황건적 잔당을 몰아내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때 항복한 청주(靑州)의 병사 30만을 수용하여 전력을 크게 강화하였다. 이각, 곽사의 난을 진정시키고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옹호하여 허도(許都)를 수도로 정한 조조는 주변의 여러 세력을 제압하고 실력을 길러 중원에 큰 거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의 주위에 유능한 참모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조는 여포(呂布), 원술 등 각지의 군웅들을 차례차례 평정해 나갔다. 서주의 여포를 물리치고 유비(劉備)를 익주로 몰아낸 조조는 그 이전부터 대립하고 있던 원소와 중원의 지배를 놓고 다툰다. 백마, 관도의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마침내 중원을 지배하고 원소가 죽은 후 그 자식들을 차례로 무찌르고 하북 지방을 차지하게 된다. 이제 그는 후한의 중심인물로서 궁전을 지배하게 된다. 인재들이 모이고 그들의 진언을 받아들여 정치에 큰 성공을 이룬다. 이어 그는 천하통일을 향해 나아갔다.

조조는 유표(劉表)의 형주를 노렸다. 유표가 죽고 후계자를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자 조조는 형주를 침공하였다. 유언서 위조로 새 태수가 된 유종(劉琮)은 싸우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조조는 유종을 청주자사로 봉하고 임지로 가는 그를 우금(于禁)에게 명해 죽였다. 형주를 손에 넣은 조조는 신야성의 유비를 습격하지만 유비는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가 지키는 강하성으로 피신한다.

장강 이남 진출을 노린 조조는 형주 분할을 미끼로 손권에게 유비의 토벌을 요청한다. 조조는 원소로부터 빼앗은 병사에 형주의 항복한 군을 합해 83만의 대군을 이루었다. 조조는 이것을 100만 군대라 칭하고 오의 손권(孫權)을 위협하였다. 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였다. 오의 군세는 겨우 3만, 동맹관계에 있는 유비의 군사를 합해도 4만에 이르지 못하였다. 조조는 안심하고 오를 칠 수 있다고 보았으나 당시의 조조군은 네 가지 약점이 있었다. 완전히 평정되지 못한 북국의 적대시, 마초(馬超)의 수도 공격 우려, 수전(水戰)의 미약함, 원소와의 오랜 전투로 인한 피로 등이었다. 인마(人馬)와 식량도 절대 부족했다. 게다가 적군 주유(周瑜)와 공명(孔明)의 계략이 너무 뛰어났다. 조조는 마침내 황개(黃蓋)의 ‘고육의 계’, 방통(龐統)의 ‘연환의 계’에 넘어가 대패하고 만다.

조조는 패기와 투지를 잃지 않고 허도로 퇴각하여 체제 확립에 힘썼다. 우선 숙적인 마초의 군사를 격퇴하고 위신을 되살렸다. 조조는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로 비단 전투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참모를 잘 쓰기로도 정평이 나 있다. 또한 학문에도 깊이가 있어 그의 《손자병법》 해설은 오늘날에도 탁월한 병법서로 남아 있다. 그 밖에 그는 시를 좋아하고 뛰어난 예술가를 아꼈다.

조조의 예술적 능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많지만 그중 전장으로 가는 도중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채염(蔡琰)과의 관계를 다룬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 피리 부는 명랑한 소녀

중국의 서동관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풍성한 숲이 있다. 그 숲에 둘러싸여 있는 장원은 남전이라 부르는 지방의 유명한 토지로 채옹(蔡邕)의 영지다. 그는 그곳 영주인 동시에 교양인으로서 추앙받고 있었다. 한때는 한나라 조정에서 불러들여 높은 지위에도 있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사리사욕에 눈먼 환관들의 모함으로 마침내 장원으로 내쫓긴 것이다. 젊은 조조가 그런 그를 따르며 어느 날 물은 적이 있다.

“영주님의 장원은 사방이 흉노족 등 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데도 항상 평화로우니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채옹은 웃으며 대답했다.

“어느 태수가 오든 예의를 지킨다네. 이민족에 대해서도 왕이건 관리건 친교를 맺으며 적개심을 내비치지 않지. 그리고 상대가 어려울 때는 기꺼이 도와주되 나 자신을 위해선 부탁을 하지 않네. 이 모든 것이 영민들과 채씨 일가가 살아남기 위해서이네. 대대로 장원의 영주들이 땅을 지켜온 방식대로 나도 그렇게 해오고 있네.”

조조는 이 말에 감동을 받았다. 힘으로 상대를 누르려는 자신과는 생각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채옹에게는 15세 된 채염이라는 귀여운 딸이 있었다. 조조는 한때 그녀를 좋아했다.

“조조님은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난세인가요, 치세인가요”하고 채염이 조조를 만났을 때 장난기로 물은 적이 있다.

“난세에 가까운 치세라고 해두지.”

이 답에 그녀는 다시 깜찍하게 대꾸했다.

“그럼 맹덕 나리께서는 지금 간웅이 되어가고 있군요.”

그러자 조조는 껄껄 웃었다. 이어 조촐한 연회가 벌어지자 그녀는 호가를 연주하였다.

“그건 이민족의 피리인가”하고 조조가 물었다.

“흉노의 악사가 준 건데 음색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곡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녀의 눈은 선율처럼 반짝였다.

• 결혼식날 약탈당한 신부

20세가 된 채염은 아버지의 권유로 한 성실한 호족의 젊은이 위중도(衛仲道)와 결혼하게 되었다. 혼례가 있는 날 축하하러 온 영민들을 밀어제치며 거친 패거리 수십 명이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채옹이 급히 나와 물었다.

“무슨 일인지요. 보시다시피 오늘은 결혼식 날입니다.”

말썽을 두려워한 채옹이 종이에 돈을 싸서 주자 그들은 그것을 세어보고 주머니에 넣었다.

“우리도 축하하러 왔소이다. 호가를 잘 분다는 그 아가씨나 좀 보여주시오.”

주위에서 “영주님, 관리를 부르세요. 저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하고 간했으나 채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자칫 일을 키울 수도 있소. 잘 달래서 보내야 하오.”

아버지가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본 채염은 제 발로 나와 패거리에게 고개 숙여 절을 하였다.

“축하해 주러 오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음식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에는 사람이 꽉 차 들어갈 수 없으니 정원에 음식을 차려 올리겠습니다.”

“참 멋진 여자군. 이 동네 사나이와 결혼하기는 아깝지 않나? 우리 왕에게 바치면 큰 상을 받을 게야.”

우두머리 남자가 신호를 보내자 부하들이 모두 달려들어 그녀를 납치해 사라졌다. 딸을 납치당한 채옹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였다. 그 남자들은 산에 살며 말 장사를 하는 거친 흉노족이었다.

결국 채염은 흉노족의 2인자인 좌현왕 앞으로 끌려갔다. 좌현왕이 그들의 두목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알리지도 않고 멋대로 말 장사를 하다니, 전원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

두목은 넙죽 엎드려 채염을 바치며 선처를 구했다.

“앞으로는 말 장사를 하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 한나라 여자는 좌현왕께 바치는 선물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좌현왕은 놈들의 천한 태도에 화가 나 다 처형해 버렸다. 채염은 좌현왕의 측실이 돼 사랑을 받으며 두 아이를 낳았다. 흉노와 거친 생활을 하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호가를 불며 마음을 위로했다.

• 조조의 마음을 사로잡은 채염의 노래

몇 년 후 조조가 있던 허도에서 한 노래가 유행했다. 한의 정승 조조는 누가 작곡한 노래인지 알고 싶었다.

“참으로 슬픈 노래입니다. 결혼식 날 납치당해 흉노 좌현왕의 측실이 된 채염의 곡이라고 합니다”하고 신하가 아뢰었다. 조조는 그녀가 대문호 채옹의 딸임을 알고 크게 놀랐다.

그 곡을 들을 적마다 조조는 그녀의 가련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처럼 밝고 명랑하던 소녀가 이처럼 슬픈 곡을 작곡한 연유를 안 조조는 좌현왕에게 사자를 보내 채염을 천금에 사겠다고 하였다. 좌현왕이 놀라 그녀를 불러 물어보았다.

“어찌하여 한나라 정승을 알고 있소?”

“조조 나리를 어릴 적 아버님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긴 당신의 아버님은 한나라의 대문호였으니 문인을 유독 존중하는 정승이 친교를 왜 아니 맺었겠소. 그런 정승께서 특별히 부탁하니 내 어찌 천년만년 그대를 잡아둘 수 있겠소.”

채염이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자 좌현왕이 다시 말했다.

“가시오. 돈은 받지 않겠소이다. 대신 아이들은 두고 가오. 정승께 안부나 잘 전해주오.”

천하를 호령하는 조조가 원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좌현왕은 돈은 받지 않고 정중하게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 후 채염은 조조의 알선으로 동사(董祀)라는 관리와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그녀의 얼굴에도 이전의 웃는 모습이 되살아났다.

• 채옹이 남긴 마지막 수수께끼

동탁이 죽은 후 옥사한 채옹의 뒤를 이어 채염은 장원을 잘 가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일 보러 나간 사이 원정 도중의 조조가 방문하였다. 그녀는 황급히 조조를 맞아들였다.

“내 진작 그대가 처한 일을 알았더라면 더 빨리 손을 썼을 터인데 미안하오.”

채염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난관을 헤치며 오늘의 위치에 오른 한 영웅의 모습에서 그 옛날 고향의 장원에서 만난, 젊은 시절의 수려했던 조조의 모습을 떠올리고 아련한 아픔에 휩싸였다. 그때 조조는 자신의 철없는 응석을 귀엽다는 듯 받아주곤 했다. 그런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지 조조는 채염을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이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때 이상한 것이 눈에 띄어 조조가 물었다.

“저것이 무엇이오.”

“조아(曹娥)의 비입니다. 후한 4대 소제 때 조한이라는 무용을 잘하는 무당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 5월 5일에 술에 취해 춤을 추다 배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당시 그의 딸 조아는 열네 살이었는데 17일간 울다가 자신도 물에 몸을던져, 며칠 후 아버지의 시체를 등에 이고 수면으로 떠올랐습니다. 현령의 도상이 약관 20세의 수재 한단순(邯鄲淳)을 시켜 그녀의 효행을 비문에 남기게 하였습니다. 그 비는 무덤 옆에 세워졌는데 아버님 채옹이 빛이 바랜 글자를 알아볼 수 없어 손으로 더듬어 읽고는 비 뒤에 8개의 문자를 크게 썼습니다. 그것이 이 척본입니다.”

‘황견유부 외손제구(黃絹幼婦 外孫虀臼)…. 이것이 무슨 뜻일까.’

아무도 그 뜻을 풀지 못할 때 양수(楊脩)가 나서 조조도 같이 생각하였다.

“이것은 은어로군. 나는 풀었네.”

조조가 8개의 문자를 4로 나누어 황견은 색이 있는 포이므로 절(絶)이고 유부는 소녀의 뜻이라 묘(妙)라고 풀어내자, 양수는 외손은 딸의 아이이므로 호(好)이고 제구는 신맛이 나는 음식을 담은 그릇이라 사(辭)라고 풀었다. 이에 ‘절묘호사(絶妙好辭·아주 묘하고 좋은 말)’가 되니 모두 조조와 양수의 기지를 찬양하였다.

조조가 채염에게 호가 한 곡을 청하자 그녀는 최근에 작곡한 조아의 곡을 불었다. 조조는 그 애절한 음률 속에서 그녀의 과거 비참함과 두고 온 자식들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조조는 그녀의 집을 나와 전쟁터로 갔고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