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0. 06:31ㆍ카테고리 없음
🟢 중국을 뒤흔든 女人 또 하나의 권력자 ‘태후’들 (5) - 청의 박이제길특(博爾濟吉特)
5. 가장 오래 살아남아 권력을 누린 황후_ 청의 박이제길특(博爾濟吉特) 씨
1625년, 즉 명 천계(天戒) 5년에 한 몽골 소녀가 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오늘날의 심양시(心梁市)인 성경(星鏡)에 도착했다.
그녀는 당시 후금의 칸(만주어로 군주라는 뜻)인 노이합적(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황태극의 부인이 되었다.
이 소녀는 몽골 과이심패륵(科李心敗勒) 채상(採桑)의 막내딸로 성은 박이제글특(博爾濟吉特)이고 이름은 포목포태(浦木浦太, 1613~1687년)였고 훗날 대청효장문황태후(大靑孝長文皇太后)라고 불린 인물이다.
당시 머나먼 대 명나라 황궁에서는 황제 주유교(舟遊敎)가 어화원(漁火原)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목공일에 빠져있자 태감 위충현이 조정을 좌지우지하며 나라를 몰락의 길로 이끌고 있었다.
그날의 혼례식이 자금성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신부 포목포태는 열세 살, 신랑 황태극은 서른네 살이었다.
황태극에게는 철철(鐵鐵)이라는 정부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조카가 바로 포목포태였다.
그녀의 고모도 11년 전에 똑같은 과정을 거쳐 똑같은 장소에서 혼례를 올렸다.
철철도 포목포태와 마찬가지로 과이심에서 출발하여 성경까지 와 당시 젊은 황태극에게 시집을 갔다.
정치적 동맹이었던 후금과 몽골의 과이심 부족에게 혼인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이 혼인으로 인해 후금의 다음 칸은 현 과이심 부족장의 외손자가 될 것이고, 이 혈연관계야말로 두 부족 간의 가장 믿을 만한 계약서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대비인 철철은 황태극에게 시집온 지 11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낳지 못했다. 황태극은 철철과 결혼하기 전에도 이미 수많은 처첩과 자녀를 거느리고 있었다.
계비(繼妃) 오랍나랍(吳拉羅拉) 씨가 장자 호격과 둘째 낙격 그리고 장녀를 낳았고, 원비 뉴호록 씨는 셋째 낙박회를 낳았다.
하지만 이 아들 중에는 몽고 박이제길특 씨의 외손은 없었다.
두 부족의 연맹관계가 시작만 하고 결실을 이루지 못하자 사람들은 몹시 불안해했다.
철철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녀가 황태극에게 시집온 지 11년 동안 그녀뿐만 아니라 그 어떤 처첩들도 황태극의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 말이다.
세 아들은 모두 철철이 시집오기 전에 태어난 아들들이었다.
거의 11년 동안 황태극이 동분서주하며 정복전쟁을 펼치느라 처첩들은 임신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과이심 부족은 마음을 졸였고 심지어 철철도 근심으로 마음의병까지 얻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미 나이가 들어 아이를 낳지 못할까 봐 몹시 걱정했다.
당시 노이 합적이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사패륵(賜牌勒)황태극이 칸의 지위를 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황태극도 이를 적극 고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부인 철철은 친정인 몽골 과이심 부족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적극적으로 황태극을 도왔다.
철철이 황태극에게 시집온 지 11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철철과 오빠 채상은 계책을 논의한 끝에 과이심 부족의 또 다른 박이제길특 씨, 즉 채상의 딸 포목포태를 후금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마음이 급한 과이심 부족의 상황과 더불어 노이합적과 황태극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데 과이심 부족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혼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후금은 혼례를 하러 오는 신부에게 특별대우를 했다.
황태극이 직접 나가 신부를 맞이했으며 심지어 황제 노이합적이 친히 자신의 모든 비와 패륵을 거느리고 성의 10리 밖까지 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어린 포목포태는 고모에게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그녀가 성경으로 시집온 1년 동안 황태극이 성경에 머무르자 대복진 철철이 드디어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딸을 순산한 철철은 자신감을 회복하여 매우 기뻐했다.
이때 후금은 정권교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다음해, 즉 천명 11년(1626년)에 노이합적이 세상을 떠나자 다른 패륵(만주어로 부족장이라는 뜻)들과 연합한 황태극은 대비 아파해(牙婆海)를 압박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칸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게 되자 철철과 포목포태에게 아들을 낳는 일은 더욱 시급해졌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마음먹은 대로만 이루어지던가? 고모와 조카 두 사람이 줄곧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았으니 모두 딸이었다.
포목포태가 황태극에게 시집온 이후로 9년 동안 철철과 포목포태는 모두 각각 세 딸을 낳았다.
반면, 이때 서비(西費) 안찰(按擦) 씨는 넷째 아들 엽포서(燁布緖)를, 측비(側費) 엽혁나랍(燁革羅拉)씨는 다섯째 아들 석색(石色)을 낳았다.
칸이 된 황태극이 영토를 넓히면 넓힐수록 그의 후궁들도 점점 더 많아졌다.
이는 자녀를 낳아줄 여인들이 더욱 많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황태극은 보통 한 부족을 멸망시키면 그 부족의 비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는데, 이렇게 후궁이 된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철철의 지위도 점점 더 흔들렸다.
이때 포목포태의 오빠 오극선(五極善)이 또 다시 황태극에게 과이심 부족의 세 번째 여인을 보냈는데, 그녀는 바로 포목포태의 언니 해란주(蟹卵主)이다.
과이심에서 더 이상 보낼 미인이 없었던 모양이다.
당시 해란주는 이미 스물여섯으로 한 번 결혼했던 사람이다.
과이심 부족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다.
따라서 어리기만 하고 매력 없는 풋내기 대신 성숙한 미인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포목포태는 75세까지 살다가 강희 26년(168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강희제가 나라를 일으키고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 손자 덕분에 높은 직분으로 존숭되어 황태극, 다이곤, 순치제 및 강희제가 세운 공훈과 업적을 자신에게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수명이 해란주, 철철, 동악비, 다이곤, 순치와 같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녀의 이름은 역사 속에 묻혔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포목포태는 그들을 이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모두 제치고 그녀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 곧 영원한 승리인 셈이다.
청태종 황태극의 장비인 효장문황태후 박이제길특 씨 포목포태는 살아서 명성을 남기고 죽은 뒤에는 추모되었으니, 분명 미소를 지으며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