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에 변강쇠 노애(嫪毐)와 진시황의 어머니 장양태후 조희(趙姬) 이야기

2022. 12. 9. 07:46카테고리 없음

🟢 천하에 변강쇠 노애(嫪毐)와
진시황의 어머니 장양태후 조희(趙姬) 이야기
              
(一) 여불위의 음모

진왕의 어머니인 장양태후(庄襄太后) 조희(趙姬)는 남편인 장양왕 이인(異人)이 죽은 뒤로부터 음심(淫心)이 더욱 강하여져서 시시로 문신후 여불위(呂不韋)를 감천궁(甘泉宮) 안으로 불러들여 동침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불위는 진왕정이 점점 장성하면서 영특함이 남보다 다르기 때문에 언젠가는 들킬 것이 두려워 장양부인으로부터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진나라의 풍속에 농사가 끝난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저잣거리에 모여 3일 동안을 즐기고 노는데, 이때 백성 중에 특기를 가진 자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 나가 각기 자기의 장기를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함양 지방에 건달로서 음녀(陰女)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노애(嫪毐)라는 자가 있었다. 애(毐)라고 이름을 지어 부른 것은 건달이라는 뜻이다. 그는 성기(性器)가 크고 단단하기로 이름이 난데다가 가끔씩 저자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동나무로 만든 수레바퀴를 뽑아 자기의 성기에다가 꽂고 빙글빙글 돌리어 자신의 것이 건장하고 큰 것을 자랑하였다. 이날도 저잣거리의 많은 부녀자가 그의 물건을 보려고 모여들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여불위는 장양부인에게 넌지시 노애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그를 궁 안에 불러들여 재주 부리는 것을 한번 보겠느냐고 하였다.  

장양부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아무리 구경은 볼 만하다지만 궁 안에 그런 자를 어떻게 끌어들인다는 말이오?”

“태후께서 꼭 보고 싶다고 하면 내가 그자가 전에 지은 죄를 들추어 생식기를 없애는 궁형(宮刑)을 실시하도록 할 터이니 궁 안에 궁형을 전담하는 형리(刑吏)에게 하사품(下賜品)을 좀 주어 그것이 썩지 않도록 하게 한 뒤에 얼굴에 수염을 모두 뽑아버리고 궁 안의 내시(內侍)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여불위가 노애를 불러 자신의 계획을 은밀히 말하고 궁 안에 들어가서 장양부인을 잘 모시도록 하라고 타일렀다. 그리하여 여불위는 형리에게 백금(百金)을 주고 노애의 고환(睾丸)을 거짓으로 썩게 한 뒤에 그의 고환 대신 당나귀의 고환을 썩혀 떼어 내어 감독하는 형리에게 보이게 한 뒤에 노애의 얼굴의 수염을 몽땅 뽑아 궁 안으로 들여보내었다.    

(二) 음녀와 강남(强男)의 불장난

노애가 궁 안으로 들어간 뒤에 여불위는 안심하고 발을 뺐지마는 노애는 장양부인과 함께 밤낮없이 마치 아교와 옻처럼 서로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지 얼마 되지 않아 장양부인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이 사실의 밖에 알려지면 큰일이 나겠으므로 태후는 점쟁이에게 뇌물을 주어 감천궁 안에 귀신의 동티가 나서 200리쯤 되는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하여야 한다고 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 점쟁이의 말을 아들인 진왕정(秦王政)에게 전하니 진왕정은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가 여불위와 가까이하는 것 같아 의심하였는데 멀리 떠난다고 하니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옛날 진나라의 초창기 도읍지인 옹주성(雍州城)이 이곳 함양에서 200리쯤 떨어져 있고 또 거기에 옛날의 궁궐이 있으므로 거기에 가서 피신해 있다가 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태후는 옹주성으로 옮겨 가게 되었고 노애는 태후의 수레 모는 사람으로 거짓꾸며 함께 떠났는데 이곳의 궁궐 이름은 대정궁(大鄭宮)이었다.

이 대정궁으로 옮겨 온 뒤로 노애와 태후는 더욱 친밀하여져서 주위의 눈도 꺼리지 않고 마치 부부처럼 생활하게 되니 2년 사이에 연년생으로 아들 둘을 낳았다. 그리고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아이를 밀실(密室)에 가두어 길렀다. 그리고 태후는 노애가 먼 지방에서 자신을 잘 보필하니 그 공로로 땅을 나누어 주도록 하라고 청탁을 하여 진왕이 그를 장신후(長信侯)에 봉하고 산양현(山陽縣)에 봉읍(封邑)까지 주었다.

이때부터 노애는 더욱 방자해지고 주위에 두려울 것이 없게 되니 그의 세력은 문신후 여불위보다 더 커졌다고들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종들이 1천여 명이나 되었고 사방에서 벼슬을 꿈꾸는 자들이 모여들어 그의 심부름꾼인 사인(舍人) 노릇을 희망하였다.

(三) 노애의 반란

진왕정 9년(기원전 238년) 4월에 진왕이 옹주성에 가서 태후를 배알하고 교사(郊祀)를 거행하였다.

교사는 주평왕(周平王)이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천도할 당시 주나라의 원래 수도가 있는 기산(岐山) 지방의 통치권을 진양공(秦襄公)에게 이양하자 진양공이 이곳 옹주에다가 교천단(郊天壇)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었는데 그 뒤 진나라가 함양(咸陽)으로 천도한 뒤에도 교사(郊祀)만은 매년 이곳에 와서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진왕정도 이번에 두 번째로 이곳에 교사를 지내러 왔고 그때마다 태후를 알현한 것이다.

이때 진왕의 나이는 22세인데 아직까지 관례(冠禮)를 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후가 진나라의 종묘(宗廟)에 고하고 관례를 행한 뒤에 진왕에게 왕관(王冠)과 대검(帶劍)을 주고 이곳에 모인 백관들에게 5일 동안을 큰 잔치를 베풀어 축하를 하게 하였다. 잔치를 베푼 지 4일 되던 날 저녁 무렵까지 진왕은 어머니인 태후와 대정궁에서 머문 뒤에 자신의 숙소인 기년궁(蘄年宮)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중대부(中大夫) 안설(顔泄)이 가는 길을 막고 역모(逆謀) 사건이 있다고 고변(告變)을 하였다. 왕은 그를 뒷 수레에 싣고 기년궁으로 돌아온 뒤에 고변의 내용을 물었다. 안설이 말하였다.

“폐하! 노애라는 자는 사실로 환관이 아니옵고 거짓으로 부형(腐刑)을 하고 남몰래 태후를 가까이하여 두 자식까지 낳았는데 오래잖아 역모를 도모한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노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  이하 생략 -----------

이사건으로 대정궁과 기년궁에서는 노애와 진왕정(진시황은 통일 후 지어진 황제의 호임)의 군사들이 충돌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외곽에서 진왕정을 호위하던 장수 환기의 대군이 들어와서야 난리는 평정되었으며 노애의 연년생인 두 아들은 진왕정이 자루에 넣고 몽둥이로 두들겨 죽였으며 노애는 저잣거리에 내어다가 네 마리의 말꼬리에 사지를 묶어 찢어 죽였고 어머니 장양태후는 유폐되었다가 스물여덟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죽음으로 간쟁하여 본궁으로 모셔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 여불위도 마침내 자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