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을 뒤흔든 女人 또 하나의 권력자 ‘태후’들 (4) - 북송의 유아(劉娥)

2022. 12. 9. 01:50카테고리 없음

🟢 중국을 뒤흔든 女人 또 하나의 권력자 ‘태후’들 (4) - 북송의 유아(劉娥)


4. 황제 못지않은 권세를 누린 여인_ 북송의 유아(劉娥)

사람들이 송진종의 황후 유아(儒雅, 969년(?)~1033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녀가 ‘아들을 훔쳐 태자로 삼았다’는 민간 전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녀는 일찍이 역사상 ‘송대 무측천’이라고 불리면서 왜곡된 이미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은 인물이다.

솔직히 역사적 전설이 완전히 불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실이 아닌 부분은 상당히 많다.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잇던 고아에서 한 나라의 국모가 되고 다시 수렴청정을 하다 용포를 걸치게 되기까지 유아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황후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역대 황후 중에서 출신이 가장 비천하고 가난하며 심지어 의문점투성이인 사람이다.

그녀는 존귀한 신분에까지 올랐지만 혈육 하나 없이 일생을 고독하게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렴청정의 제도를 확립한 황태후였다.

그녀로 인해 송 황조에서 수렴청정을 한 황태후는 자그마치 여덟 명에 달했다.

유아 이전 태후들의 시호는 모두 두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황 무측천을 본떠 황후의 시호를 네 자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무측천 다음으로 용포를 입은 유일한 여인이다.

유아는 한대 여후, 당대 무측천과 함께 3대 여주(女主)로 일컬어지며 무측천의 재능과 흉악함을 모두 지닌 송대 여성 권력가였다. 청대 자희(自熙: 서태후)는 그녀를 매우 존경하여 『송대장전 황후고사』를 참조하여 자신의 모든 수렴청정 체제를 수립하라는 분부를 내리기도 했다.

유아의 일생은 크게 15년씩 네 번으로 나눌 수 있다.

첫 15년은 그녀가 민간에서 고아로 힘들게 생활하던 시기이고,

두 번째는 그녀가 조항(條項)의 첩으로 잠시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다가 내내 숨어 지내며 두려움에 떨던 시기다.

세 번째 15년은 송진종의 총비였던 시절이고, 네 번째 15년은 권력을 손에 넣고 황후와 황태후로 살던 때이다.

983년, 즉 송태종 태평흥국 8년에 태종 조광의는 모든 황자들을 왕으로 봉하고 각자의 영지를 다스리도록 명했다.

그때 열여섯 살이던 셋째 아들 조항도 한왕(韓王)으로 봉해졌다.

궁을 나온 한왕은 마치 새장에서 빠져나온 새처럼 자유롭게 살았는데, 그때 평생 사랑하게 될 여인을 만난다.

그 여인이 바로 촉중(促中)에서 피난온 평민 유아였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유아는 공미(塨美)라고 불리던 은 세공장이와 함께 지냈지만, 이후 황실에서는 유아가 명문가 출생이라고 기록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의 본적은 태원(太原)이고 조부 유연경은 오십대국의 후진, 후한 때 유효위 대장군을 지냈고 부친 유통관은 호첩부 지휘사를 지냈으며 어머니 방씨 역시 명문가 출신이라고 한다.

심지어 어머니가 자신의 품으로 달이 떨어지는 꿈을 꾸고 그녀를 임신했다는 등 그녀가 태어날 때 좋은 징조가 수없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아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줄곧 가족을 찾지 못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피난 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였을 것이다.

송태조가 후촉을 멸망시킨 이후로 촉나라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봉기했는데, 이때 전쟁과 난리통 속에서 유아가 가족을 잃은 듯하다.

어린 유아는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에 오늘날의 북과 비슷한 악기인 도고를 치는 기술을 배웠다.

당시 보기 드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유아는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

아름답고 총명했던 유아는 우연한 기회에 평복을 입고 저잣거리로 나온 조항의 눈길을 사로잡으면서 조항의 곁에서 지내게 됐다.

어린 남녀가 첫사랑에 빠지면 결코 갈라놓을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이지 않던가?

하지만 이처럼 신분 차이가 크게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은 대개 주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우선 두 사람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조항의 유모인 진국부인이 태종에게 이 사실을 고자질했다.

마침 아들을 명문가의 규수와 결혼시키려고 준비하던 송태종 조광의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크게 노하며 왕부(王府)에서 유아를 쫓아내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조항이 유아를 자신의 심복인 장기의 집에 숨겨두면서, 그녀는 그렇게 10여 년을 숨어 지냈다.

이제 막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날을 맛본 어린 소녀에게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으며 이때의 생활은 그녀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곧바로 조항은 조광의의 뜻을 받들어 대장군 반미의 딸 반씨를 아내로 맞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억지로 갈라선 조항이 왕비 반씨에게 모든 화풀이를 하는 바람에 반씨는 시집오자마자 냉대를 받았다.

게다가 아버지 반미마저 북벌에 패해 큰 벌을 받으면서 친정의 세력이 기울기 시작하자 그녀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결국 반씨는 시집 온지 몇 년 만에 우울증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만약 외부에서 정치적 기후에 변화가 없었다면 유아는 평생 숨어 지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황제의 숨겨둔 첩으로 살다 죽는다 해도 결코 억울한 삶은 아니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해주었다.

중국 역사상 두 번째 여황제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만약 유아가 무측천처럼 여든한 살까지 살았다면 아니면 10년을, 5년을 더 살았다면 분명 정확한 대답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유아는 무측천을 제외하고 용포를 걸친 유일한 여인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용포를 걸친 여인은 이 두 사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