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 전투 - 유비(劉備)의 몰락과 이릉(夷陵)전투

2022. 12. 8. 05:05카테고리 없음

🔴 삼국지 전투 - 유비(劉備)의 몰락과 이릉(夷陵)전투

이릉 대전(夷陵大戰 / 夷陵大戦), 또는 효정 전투(猇亭戰鬪)는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손권의 오나라를 침공해 발발한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유비는 육손의 화공(火攻)과 뒤이은 공격에 의해 참패하고 백제성까지 물러났다.
이로 인해 실의에 빠진 유비는 223년 사망한다.

이 전투로 촉이 쇠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릉전투에서 촉이 패배한 후 유비가 죽은 후, 남방에서는 맹획, 옹개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북벌은 번번히 실패했으며 제갈량이 죽은 후에는 강유의 잦은 북벌과 정치적인 혼란으로 촉은 패망했습니다.

아래는 이릉전투에 대한 글을 발췌해 본것입니다.

손권이 관우를 참수하고 형주를 빼앗자 유비는 크게 노하여 제갈량의 만류를 뿌리치고 몸소 대군을 이끌고 손권을 토벌하러 원정길에 오른다.
한편 장비는 원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 장달(張達) 범강(范疆)에게 암살당한다.

- "유비가 오나라를 토벌할 때, 장비는 만 명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낭중으로부터 나와 강중에서 유비와 만나기로 했다. 출발하려고 할 때, 그의 막하의 장수 장달(張達) 범강(范疆)이 장비를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갖고 장강을 따라 손권에게로 달려갔다." <정사삼국지>"장비전" 중에서 -

거기장군 장비가 측근에게 살해되었다. 당초, 유비는 손권이 관우를 습격한 일에 분노하여 동쪽 정벌에 나서려고 했었다. 가을 7월에 군사들을 인솔하여 오를 토벌했다.
손권이 편지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지만, 유비는 격노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오나라 장군 육의(陸議) 이이(李異) 유아(劉阿)등은 무현(巫縣) 자귀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계의 장군 오반(吳班) 풍습(馮習)이 무현으로부터 이이 등을 공격하여 격파시키고, 군대를 자귀현에 주둔시켰다.
무릉(武陵) 오계(五稽)의 만족이 사자를 보내 병사를 요청했다.

2년(222) 봄 정월에 유비의 군대는 자귀현으로 돌아왔고, 장군 오반 진식(陳式)의 수군이 이릉(夷陵)에 주둔했으며, 장강 동서쪽 해안에 진영을 설치했다. 유비는 자귀현으로부터 장군들을 인솔하여 진군해 산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이도(夷道)의 효정에 진영을 두었다.
흔산(痕山)으로부터 무릉을 지나서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 오개의 만족을 위로하도록 했으므로, 만족은 모두 서로 이어서 호응하여 행동을 일으켰다. 진북장군 황권(黃權)이 강북의 군대들을 통솔하여 이릉도에서 오나라 군대와 서로 대치했다.

여름 6월, 자귀현으로부처 10여 리즘 되는 곳에 황색 기운이 나타났는데, 넓이가 수십 장이나 되었다.
그후 10여 일 있다가 육의(陸議)가 효정에서 유비의 군대를 크게격파시켰으며, 장군 풍습 장남(張南)등은 모두 전사했다.
유비는 효정으로부터 자귀로 돌아와 흩어졌던 병사들을 모아서 배를 버리고 육로로 어복(魚復)으로 돌아왔다.
어복현을 바꾸어 영안(永安)이라고 불렀다.
오나라는 장군 이이 유아 등을 파견하여 유비의 군대를 추격하고 남산(南山)에 주둔했다.

가을 8월에 유비는 병사를 모아 무현으로 돌아왔다. 사도 허정이 죽었다.

겨울 10월에 승상 제갈양에게 조서를 내려 성도(成都)에 남교(南郊 : 동짓날 하늘에제사지냄) 북교(北郊 : 하짓날 땅에 제사지냄)의 제단을 세우도록 했다. 손권은 유비가 백제성(白帝城)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사자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다.
유비는 그것을 허락하고 태중대부(太中大夫) 종위(宗瑋)를 보내 이 일을 완결짓고 돌아오도록 했다.

겨울 12월에 한가(漢嘉)태수 황원(黃元)은 유비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병사를 일으켜 저항했다.

3년(223) 봄 2월에 승상 제갈양이 성도에서 영안으로 왔다.
3월, 황원이 병사를 진군시켜 임공현(臨攻縣)을 공격했다.
유비는 장군 진홀(陳忽)을 파견하여 황원을 토벌하도록 했다.
황원의 군대는 패하고 장강을 따라 내려갔다.
황원은 자신의 호위병에게 결박당하여 그대로 성도로 보내졌으며 참수되었다.

유비는 질병이 심해지자, 승상 제갈양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상서령 이엄(李嚴)에게 보좌하도록 했다.

광무 3년(223) 여름 4월 계사일, 유비는 영안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