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8. 02:54ㆍ카테고리 없음
🟢 중국을 뒤흔든 女人 또 하나의 권력자 ‘태후’들 (3) - 당대 무측천(武則天)
3.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여인_ 당대 무측천(武則天)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624년~705년)이 죽은 뒤 남긴 것은 글자 없는 비석이었다.
자신에 대해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그녀는 후세에 무수히 많은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큰 업적을 남긴 여러 황제를 능가할 정도였다.
무측천은 당고조 무덕 7년(624년)에 형주(刑誅) 도독(道獨) 무사화(武士化)와 수나라 종실 출신인 양씨의 딸로 태어났다.
열네 살이던 무측천은 집안 배경과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궁녀로 선발되었다.
입궁하여 당태종의 재인(才人)이 된 무측천은 그에게 직접 미랑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하지만 무미랑이라고 불리기 이전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신당서(新唐書)』의 ‘측천황후 본기’에는 무씨휘후라 적혀 있지만 『신당서』의 ‘지제이십칠지리일(志第二十七地理一)’에는 또 화주, 화음 두 지역의 무측천이 섭정하던 수공년에 피휘(왕이나 높은 이의 이름에 사용된 것은 피한다는 뜻)하여 이름을 바꾸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보면 아마도 그녀의 본명은 무화후가 아닐까 짐작되는데, 사내 이름 같은 이 이름은 아버지 무사확이 남자아이 옷을 입혀 그녀를 키웠다는 이야기와도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그녀는 황제가 된 후에 자신의 이름을 ‘높이 떠있는 해와 달처럼 세상을 비춘다’는 뜻을 가진 조(組)자로 바꾸었다.
측천이란 두 글자는 아들 이현이 그녀에게 ‘측천대성황후(測天大成皇后)’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나온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불리던 이름에 따라 그녀를 ‘무측천(武測天)’이라 불렀다.
무측천은 든든한 집안 배경과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입궁하자마자 당태종에게 이름을 하사받는 영광을 누렸다.
출발은 누구보다도 멋졌지만 이후 12년이란 긴긴 세월동안 당태종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녀는 줄곧 ‘재인’의 신분에 머물러야 했다. 반면 무측천보다 두 살 어린 재인 서혜는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입궁했지만 줄곧 신분 상승하여 재인, 첩여(捷女), 충용(充用)을 거쳐 마침내 비(妃)의 자리까지 올랐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당시 유명했던 ‘사자총사건’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태종에게는 사자총이라고 불리던 명마가 한 필 있었는데, 성질이 워낙 난폭하여 그 말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당태종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무측천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채찍과 철퇴, 비수만 있으면 소첩이 그 말을 다룰 수 있습니다.
말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철퇴로 머리를 후려치고 그래도 난동을 피우면 비수로 저 놈의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당태종은 “의지가 매우 훌륭하구나”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당시 겨우 십대였던 어린 소녀는 그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태종은 그녀의 용감함을 칭찬하긴 했지만 여성스럽지 못한 그녀에게 전혀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직접 무측천의 이름을 미랑으로 바꾼 것도 남자 이름 같은 그녀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당태종은 서혜처럼 조용하고 여성스러운 사람을 더 좋아했는데, 무측천은 지나치리만큼 활발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후세 사람들의 글을 보면 서혜는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자제력이 뛰어나 유가에서 말하는 모범적인 여성이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지혜롭고 총명했던 서혜가 당태종에게 고구려 정벌과 궁의 대대적인 수리를 간언하던 모습은 장손황후(長孫皇后)와 매우 흡사하다.
장손황후는 일생 수많은 여인을 거느린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여인이다.
당태종은 장손황후가 세상을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녀와 닮은 서혜를 다시 얻었다. 이를 보면 당태종은 장손황후를 대신할 사람을 찾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서혜가 황제의 총애 속에 있을 때 무측천은 오랫동안 후궁전에서 외롭게 지내야했다.
보는 눈이 제각각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측천은 아버지 당태종에게는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아들 이치(理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장손황후의 셋째아들인 이치는 두 형인 태자 이승건과 위왕 이태가 태자 자리를 놓고 다투다 둘 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어부지리로 태자가 된 인물이다.
이치는 처음부터 태자 교육을 받으며 자라지 않은 데다 이미 위로 강력한 두 형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성격이 우유부단했다.
아버지 당태종은 이러한 이치가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당시 무측천보다 네 살 어렸던 이치는 자신보다 어린 태자비 왕(王)씨와 처첩 여럿을 이미 거느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있던 여인들과 달리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성격이 강한 미인 무측천을 만나자마자 곧바로 그녀의 매력에 빠졌다.
또 하나, 이치의 입장에서는 아버지 곁에서 시중들던 사람과 가깝게 지내면 늘그막에 자주 변덕 부리던 아버지의 의중과 기분을 미리 파악하여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당시 무측천은 죄책감과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이 ‘금지된 사랑’에 저주를 퍼붓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는 훗날 그 사랑에 감사했을 것이다.
힘든 시기에 ‘금지된 사랑’이 오히려 이치로 하여금 다른 여인들보다 무측천에게 더 많은 사랑을 느끼게 만들었다.
갖지 못하는 것에 더 마음이 가듯, 가질 수 없었기에 무측천에 대한 마음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