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7. 09:29ㆍ카테고리 없음
🟢 삼국지의 여인들 3 - 1 초선과 여포
글 : 민희식 전 서울대교수
그림 : 유승배
여포는 초선과 함께 도망쳤다.
동탁의 애첩이 된 초선이 잠시 휴가를 얻어 집에 다니러 오자 초선의 의부이자 한나라의 사도(司徒)인 왕윤(王允)은 초선과 함께 여포(呂布)를 이용하여 동탁을 제거하기로 한다. 이에 여포의 저택으로 왕윤의 사자가 달려갔다. 여포는 칠보로 장식된 황금 관을 쓰고는 적토마를 타고 왕윤의 저택으로 갔다. 여포가 오자 얼굴에 화색이 도는 초선을 보고 왕윤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왕윤 나리. 어인 주안상입니까?”
여포는 느닷없는 환대에 뭔가 미심쩍은 얼굴을 하였다. 왕윤은 준비해 둔 말을 늘어놓았다.
“장군의 용기는 한나라의 자랑거리입니다. 패수관에서 대승을 하고 변경까지 안정시키니 사방에서 장군에 대한 칭송이 자자합니다. 이 나라에 장군을 당할 자 그 누가 있겠습니까. 허니 이 늙은이가 경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진작 이러한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그간 결례가 컸습니다.”
그 말을 듣자 여포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왕윤이 시녀에게 신호를 보내자 초선이 나타났다.
“부르셨어요, 아버님.”
오늘따라 유독 멋지게 차려입은 그녀였다.
“이 여인이 바로 댁의 따님이었군요. 처음 본 것이 패수관 전투 때이니…. 벌써 2년이 지났소. 그때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저를 기억해 주시니 소녀 기쁩니다. 그날처럼 오늘 밤도 장군을 위해서 이 초선이 검무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초선이 손에 칼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여포는 깜짝 놀랐다. 왕윤은 땀에 젖은 손을 꽉 쥐었다.
“검무라니…. 기대되는구려.”
• 초선의 劍舞로 싹튼 여포의 戀心
스스로 의식하지 않아도 그녀의 모습과 표정에는 요염함과 순진한 맛이 뒤섞여 있었다. 때로는 요염하게 때로는 과감하게 초선은 자기가 지닌 모든 기교를 선보이며 춤을 추었다. 한 번씩 칼끝이 여포를 향함에도 여포는 까딱하지 않았다. 초선은 춤에 열중하면서 조조를 만났을 때 자신이 추었던 검무를 떠올렸다. 냉혹하고 재치 있는 조조에 비해 여포는 통이 크고 상대적으로 정이 넘쳐흐르는 듯 느껴졌다. ‘조조님 죄송합니다. 이제 저는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믿고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춤을 추며 눈물을 흘렸다. 왕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 눈물의 의미를 왕윤도 여포도 알 리가 없었다. 검무를 마친 초선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여포 나리. 저를 데려가 주세요. 저는 이미 나리를 심중에 두고 있습니다. 동탁 곁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여포는 당황하였다. 주군인 동탁의 애첩이 자기를 마음에 두고 있다? 동탁이 이 말을 들으면 그는 초선을 죽일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진심일까?
“오늘은 제가 과음한 것 같소이다. 왕윤 나리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여포는 적토마에 올라탔다. 왕윤과 초선은 둘 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왕윤은 긴장으로 초선은 춤과 격정적인 심정으로 그리된 것이었다.
여포가 왕윤의 표정을 제대로 살폈더라면 여포를 이용해 동탁을 제거하려는 초선의 계획은 꼬리를 잡혔을지도 모른다. 고문이라도 하면 왕윤도 자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여포는 그런 생각을 할 머리가 없었다. 물론 초선이 여포를 사모하는 건 사실이었다. 초선으로서는 동탁도 제거하고 여포도 얻는, 그야말로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얻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기울어가는 한나라를 재건하고 백성을 고통 속에서 구해내는 일이었다.
초선과 왕윤의 계획은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 동탁 정벌
왕윤은 동탁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조조를 조심하라고 한 일전의 그 밀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편지였다. 말하자면 은밀한 초대였다. 동탁은, 그렇지 않아도 초선이 왕윤의 집으로 간 지 여러 날이 되어 무척 궁금하던 차였다. 초선이 없는 틈을 타 눈여겨둔 몇몇 궁녀를 겁탈하듯 품어보았으나 초선만 한 여자가 없다는 사실만 새삼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편지에서 초선의 달콤한 향취가 풍겨오는 것만 같아 동탁은 지체없이 왕윤의 저택을 방문하였다. 수레에서 내린 동탁은 무장한 100여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동탁이 자리에 앉자 왕윤은 동탁의 공덕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풍류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산해진미와 좋은 술이 연이어 나왔다. 왕윤은 동탁이 한나라의 뒤를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천문학의 건상(乾象)을 살핀 결과임을 과시하며 말했다. 동탁은 그 말을 듣고 자기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겸손을 떨었지만 눈빛은 음흉하게 빛났다. 왕윤은 동탁의 도의와 패기로 그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다시 치켜세웠다. 동탁은 마지못한 척, 천명이 자신에게 오면 왕윤에게도 거기에 어울리는 자리를 주겠다고 약조하였다.
왕윤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초선을 부르니 악사들의 현금 연주소리가 은은히 울려오는 가운데 초선이 나타나 매우 미묘하고 교태 어린 춤을 추었다. 춤이 끝나자 동탁은 초선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였다. 초선은 오랜만에 보는 낭군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숙였다. 동탁은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자신에 대한 그리움에 불타는 듯한 눈동자를 보고 다시금 넋이 나간 채, 그 비대한 몸 어딘가에 행복이라는 게 밀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왕윤 사도. 나는 정말 복받은 사람인 것 같소. 당신 같은 인재에다 초선과 같은 절세미녀를 곁에 둘 수 있으니 말이오.”
“동탁 나리. 초선이 매우 피곤한 것 같습니다. 들어가 쉬라고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니오. 그녀는 나와 함께 지금 성으로 돌아가야 하오. 요즘 여포가 이곳에 드나든다는 말을 언뜻 들었소. 하하 나 이 동탁이 걱정이 좀 되는구려. 여포 이 친구가 내 시녀와 정을 통한 전과가 있어서 하는 말이오.”
시녀와의 치정사건은 여포가 어전에서 동탁의 호위를 맡고 있을 때의 일이었지만 이 말을 듣는 초선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것을 혐오감의 표출로 본 동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할 것 없다. 그 녀석이 아무리 단순무식해도 내 여자에게 손댈 만한 바보는 아니니까.”
동탁이 어젯밤 초선을 데리고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여포는 바로 적토마를 타고 왕윤에게로 달려갔다.
“왕윤 나리. 어제의 일은 대체 어찌된 것이오.”
“어찌되다니요. 장군이 스스로 찾아온 것뿐이온데….”
여포의 낭패한 모습을 보고 왕윤은 얼버무렸다.
“설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겠죠?”
• 동탁 곁의 초선을 본 여포
흥분한 여포가 다그쳤다.
“나도 초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동탁 태사야말로 여포 장군이 초선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더이다.”
“뭐라고요? 초선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당장 내 뜻을 장군에게 알려야겠소.”
이렇게 말하고 여포는 질풍처럼 사라졌다. 초선의 앞날을 생각하자 왕윤은 매우 우울해졌다.
“이러다 내 딸과는 영영 이별이 되겠구나.”
왕윤은 한숨을 쉬었다.
여포가 왕윤의 집에서 나올 무렵 초선은 동탁의 품에 안겨 있었다. 쾌락에 젖은 척 신음을 내던 그녀가 탄식하며 말했다.
“저번에… 여포 장군이… 오셨을 때… 사실 사랑을 고백받았습니다.”
“뭐라고?”
동탁은 그 절구통 몸을 멈추고는 어서 고하라고 재촉했다.
“그것뿐입니다. 그 말에는 응할 수 없다고 전했습니다. 여포 장군은 제가 동 태사의 애첩인 것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흠, 그래 알겠다. 내 오늘은 몹시 피곤하구나. 그만 쉬거라.”
의외로 동탁은 추궁을 멈추었다. 초선은 알고 있었다. 동탁의 가슴에 질투의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여포가 동탁의 처소로 가자 아니나 다를까 동탁 곁에 초선이 붙어 있었다. 젖은 눈동자에서 방사되는 눈빛이 여포의 몸을 녹여내듯 휘감아왔다. 그 요염한 눈길을 털어버리듯 입구에 우뚝 선 채로 여포가 동탁에게 말했다.
“나리께서 오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저는 동 태사께 거듭 충성을 맹세코자 왔습니다.”
“물러가라. 오늘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여포는 동탁의 심상치않은 기색을 보고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며칠 후 초선은 여포에게 <여포 나리. 저를 영원히 가져보지 않겠습니까>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적은 편지를 보냈다. 단순한 여포에게는 구구절절 설명보다는 강렬한 한마디가 통할 거로 보았던 것이다. 만약 여포가 거절하면 왕윤 부녀의 목숨은 이미 저세상으로 간 거나 다름없었다. 동탁은 배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얼마 전 사도 장온이 원술과 내통했다고 사람을 시켜 무고하고는, 연회석에서 그를 죽여 그 시체를 요리하여 문무백관과 나누어 먹고 나머지는 개에게 준 적이 있는 동탁이었다.
• 여포를 달랜 동탁
여포도 동탁을 쳐야 할 이유가 없었다. 동탁이 죽으면 각지에서 반동탁파의 제후들이 일어설 것이고 그전에 동탁의 부하들이 난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그러면 자신도 매우 위험해진다. 여포는 초선을 손에 얻는 일과 이 위험을 저울질하였다. 초선이 조조나 동탁 앞에서도 검무를 춘 것을 알고 있는 여포로서는 그녀를 손에 넣는 것은 그들에 대한 승리이기도 했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여포지만 사랑의 전투에서만은 초짜였다. 그러기에 사모의 정이 한 번 거세게 일어나자 그 불길은 모든 우려를 잠재우며 활활 타올라 꺼질 줄 몰랐다. 여포는 생각했다. 초선을 위해 동탁을 죽여야겠구나. 하나 워낙 목숨이 걸린 일인지라 아직은 주저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여포가 동탁이 편찮다는 말을 듣고 문병차 들르자 동탁은 잠에 빠져 있고 초선은 침실에서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여포는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동탁은, 여포가 침상 뒤를 주시하고 있고 거기에 초선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놈, 내가 아끼는 계집을 넘보아 어쩌려는 거냐!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라.”
동탁은 감미로운 쾌락에 젖는 시간을 잠시도 낭비할 수가 없었다. 동탁은 초선을 맞은 후부터 아예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동탁이 조금만 몸이 아파도 초선은 잠은커녕 허리띠도 풀지 않고 정성껏 돌보는 시늉을 하여 동탁은 거기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여포는 분을 참은 채 그 자리를 물러섰다. 돌아오는 길에 동탁의 사위 이유를 만나 억울한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이유는 그 길로 동탁을 찾아갔다.
“천하를 손에 넣으실 태사께서 어찌 하찮은 일로 여포를 책망하십니까. 여포의 마음이 변하면 천하대사를 그르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내일 여포를 불러 금은보화를 내리시고 달래시죠.”
다음날 동탁은 여포를 불러 위로하였다. 동탁이 마지못해 사과하고 금품을 하사하자 여포는 기분이 다소 풀렸으나 마음은 이미 초선에게 가 있었다.
어느 날 동탁이 헌제와 대담하는 틈을 타 여포는 동탁이 거주하는 승상부로 말을 몰았다. 후당에 꿈에 그리던 초선이 있었다. 초선은 후원 봉의정(鳳儀亭)에 가 기다리라고 속삭이고는 얼마 후 옷을 갈아입고 거기로 나타났다. 초선이 여포의 가슴에 안기며 울먹였다.
“저는 왕 사도의 친딸은 아니지만 친딸처럼 아낌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장군을 만나뵙고 사모하게 되어 평생 장군을 모시리라는 소원을 품었는데 동탁 태사께서 이 몸을 다시 더럽혔습니다. 이 초선은 그저 죽고만 싶습니다. 이제 다행히 장군을 뵈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더는 장군을 모실 수 없으니 장군님 앞에서 목숨을 끊고자 합니다.”
• 초선과 껴안고 있는 여포를 발견한 동탁
초선은 갑자기 난간을 붙잡고 연못에 뛰어들려고 하였다. 여포는 다급하게 초선을 붙들고 애간장이 타는 심정으로 속삭였다.
“나도 그 마음을 알고 있소. 진작 말을 나누지 않은 내 잘못일 뿐이오.”
“초선에게는 하루가 일 년처럼 지루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속히 구해주세요.”
초선이 슬프게 바라보니 여포의 가슴은 불타는 듯했다.
“지금은 잠시 몰래 빠져나온 것이오. 의심을 살지 모르니 우선은 돌아가야겠소.”
“장군님께서 이처럼 남의 눈을 두려워하신다면 제 눈은 햇빛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포는 초선을 달랬다.
“나에게도 생각이 있으니 두고 보오.”
여포가 급히 가려 하자 초선이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장군께서 천하의 영웅이라는 소문이 이 궁 안에서는 자자합니다. 전쟁터에서 우레와 같이 지른 소리는 어디 갔습니까. 그 명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무엇이 두렵단 말입니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여포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 여포는 다시 말에서 내려 초선을 품에 안고 위로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동탁은 주위에 여포가 보이지 않자 수상쩍은 생각이 들어 급히 헌제와 작별하고 승상부로 돌아왔다. 승상부 앞에 여포의 적토마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문지기에게 여포가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네, 장군께서는 후당으로 가셨습니다.”
동탁은 급히 후당으로 갔으나 여포는 보이지 않았다. 초선도 보이지 않았다. 시첩이 초선 아씨는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있다고 아뢰었다. 동탁이 그곳에 가보니 여포와 초선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분노한 동탁이 고함을 지르자 놀란 여포가 뒤를 돌아보고는 도망치려 하였다. 여포는 동작이 민첩해 급히 도망쳤고 비대한 동탁은 그를 따를 길이 없었다. 화가 난 동탁이 창을 던져 여포를 죽이려 했으나 날랜 여포는 그 창을 받아 땅에 내던졌다. 동탁은 여포를 쫓아 뒤뚱대며 달려가다 후원 문 밖에서 한 사내와 부딪쳐 그만 나가떨어졌다. 동탁과 부딪친 자는 모사 이유였다. 이유는 동탁을 일으켜세워 서원으로 모시고 갔다.
“여포 이놈이 나의 계집을 희롱하다니! 그놈은 죽어 마땅하다.”
“태사님께서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초선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계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포는 태사님을 지켜주는 심복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초선을 여포에게 주면 여포는 그 은혜에 감동하여 목숨을 바쳐 태사님을 도울 것입니다.”
동탁은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을 하였다.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군. 잘 생각해 봐야겠다.”
이유가 돌아가자 동탁은 초선을 불렀다.
“너는 왜 나 몰래 여포와 정을 통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