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6. 09:00ㆍ카테고리 없음
🟢 중국을 뒤흔든 女人 또 하나의 권력자 ‘태후’들 (1) - 서한의 여후(呂后)
여후부터 자희에 이르기까지의 5,000년 중국 역사는 남성과 여성의 권력 다툼의 역사이다.
또 하나의 권력자 ‘태후’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어머니와 아내라는 이름을 버린 여인들이 있었다.
이 황실 여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역사에 제왕으로 기록된 황후 - 서한의 여후(呂后)
여치(呂雉, 기원전 291년~기원전 180년)는 고황후, 고후, 여후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치(雉), 자는 아후(亞後)로서 서한(西漢)을 건국한 고조 유방의 황후이다.
젊은 시절 여치는 아버지 여태공을 따라 원수를 피해 패현으로 왔다.
여후에 관한 고사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여후가 잘못을 저질렀으며 유방이나 척희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경기장에서는 항상 남성에게 유리한 규칙이 적용된다.
역사는 남성 승리자에게는 ‘지혜’라는 영광의 관을 부여하며 그들의 수단보다는 성공을 더 부각시킨다. 이와 달리 여성 승리자에게는 항상 ‘잔인’이라는 꼬리표를 단다.
여후는 중국이 봉건사회에 진입한 이후 등장한 첫 번째 여성 집권자이다.
한대(漢代)도 조대(朝代)와 같이 부계사회였지만 모계사회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여후를 제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양한(兩漢: 중국의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을 통틀어 이르는 말) 시기에 집권한 황제들도 여전히 태후들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경제(漢景帝)의 어머니인 두태후(豆太后)는 경제를 종용해 자신의 아들 양왕(梁王) 유영(孺嬰)을 보위에 올리려 했으나, 이후 관도공주(官途公主)의 개입으로 결국 경제는 태자 유영을 폐위시키고 유철(有鐵)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이후 황제로 등극한 유철이 바로 역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한무제(韓無帝)이다.
한무제는 집권 초기 10년 동안은 할머니 두태후와 어머니 왕태후(王太后)의 간섭 아래에 있었다.
그때의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한 무제는 죽기 직전,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구과부인(毬果婦人)을 죽여버렸다.
이후 동한(東漢)시대로 접어들면서 모후들의 권력행사는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황태후들로는 장제 두태후, 화희 등태후, 안사 염태후, 순열 양태후, 환사 두태후, 영사 하태후 등이 있고, 그중에서도 화제(和劑)의 황후인 등수(燈穗)가 가장 유명하다.
한대 여성들은 이후 다른 어떤 시대의 여성들도 가지지 못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태후로서 나랏일에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 세력을 뻗쳤다.
그녀들의 힘을 짐작할 만한 첫 번째 근거로는 호칭을 들 수 있다. 당시 많은 황족이 자신의 어머니 성씨에 따라서 불렀는데, 이는 이후 조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한나라만의 독특한 관습이다.
두 번째 근거로는 작위를 들 수 있다.
한대의 많은 여성은 제후로 봉해지면서 그에 걸맞은 작위와 봉읍을 가졌다.
예를 들면 한고조 유방은 형의 부인에게 음안후(音安候)라는 작위를 내렸고, 뒤이어 권력을 잡은 여후는 소하의 부인을 찬후(贊後)에, 번쾌의 아내인 여수를 임광후(任光後)에 봉했다.
또 한문제(寒門帝)때는 제후 왕녀들에게 2,000호(戶)규모의 읍을 하사하기도 했다.
세 번째 근거로는 건축물을 꼽을 수 있다.
몇 년 전, 고고학자들은 장락궁에서 출토된 벽화 속의 방이 모두 붉은색 바닥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는 보통, 규모가 큰 집의 바닥을 붉은색으로 칠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진(溱)의 함양궁(檻羊宮) 1호 궁전과 3호 궁전의 주전(主前)바닥은 모두 붉은색이다.
한나라도 진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해 진시황이 그랬던 것처럼 황제 정도의 특별한 사람들만 붉은색 바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붉은 바닥이 황제가 머물던 미앙궁에서만 발견된 것이 아니라 태후의 거처인 장락궁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를 보면 현대 여성들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한대에는 이후 다른 시대와는 달리 여성의 재혼문제에 개방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한문제의 어머니 박희와 한무제의 어머니 왕희(王喜)처럼 재혼한 몸으로 당당하게 국모(國母)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결혼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재상 진평의 부인으로, 진평이 그녀의 다섯 번째 남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이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