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의 여인들 2 - 2 조조와 초선

2022. 12. 1. 03:23카테고리 없음

🟢 삼국지의 여인들 2 - 2 조조와 초선

글 : 민희식 전 서울대교수
그림 : 유승배

• 여포의 등장

후궁에는 미녀가 800명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탁은 자신의 침실에 틀어박혀 초선의 몸만 미친 듯 탐닉하였다. 조조의 예에서 보듯 언제 누가 또다시 암살하러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녀를 탐하고 싶을 만큼 그녀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여자였다.

왕윤은 동탁에게 조조의 습격을 피하셨다니 천만다행이라고 겉치레로 아뢰었다. 밀서를 보내 암살을 모면케 한 왕윤의 충정을 동탁은 치하하며 앞으로도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왕윤은 원하지 않게 동탁의 오른팔이 되었다. 도읍을 낙양에서 장안으로 옮긴 후에도 그 관계는 변치 않았다. 왕윤은 모든 것을 체념하였다. 동탁을 거역할 수도 없고 초선을 되찾아 올 수도 없었다. 특히 초선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암살이 실패한 그날 밤 이래로 초선은 조조가 자기를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밤마다 동탁의 무거운 몸에 깔려, 압사되는 듯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조조가 전국의 제후들에게 반동탁연합의 격문을 보내 군사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선은 다시 희망에 부풀었다. 조조의 무공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때가 멀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런 중 장안으로 가는 동탁을 추격했던 조조의 군대가 그만 참패하고 말았다. 패퇴를 거듭한 반동탁연합군이 마침내 해산되자 초선은 희망을 버려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삶의 보람이 있다면 그건 여포였다. 그녀가 처음 여포를 만난 것은 수도가 아직 낙양에 있던 무렵으로 반동탁군과 동탁군이 패수관에서 격돌하기 며칠 전이었다. 그날 동탁의 명으로 초선은 장군들 앞에서 악곡을 연주하였다. 전투 전에 장군들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두 그녀의 미모에 사로잡혀 연주를 들으며 정신을 잃는 가운데 여포가 나타났다.

“여쭙니다. 곳곳에서 전투가 치열한데 동탁 나리께서 도통 전투에 나서지 않으시니 그 연유를 묻고 싶습니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한낱 여자에게 빠지신 건지….”

여포는 동탁 앞에서도 당당했다. 머리털을 3으로 가르고 그 위에 사자의 모습이 그려진 투구를 썼는데 붉은 군복에는 야수들이 싸우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어서 대답하시오. 동탁 나리!”

“어허, 유능한 장수들이 모두 나섰거늘 내가 그들의 공적을 뺏어야 옳단 말이냐?”

동탁은, 스스로 생각해도 명답을 말했다는 듯 거만하게 웃었다.

“그래서 누가 나리께 확실한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까?”

오만하리만큼 당당한 목소리로 여포가 외쳤다.

옆에 있는 장수가 초선에게 “저분이 여포요”하고 속삭였다. 초선도 여포의 소문은 익히 들은 바 있었다. 낙양을 점령한 동탁과 부자의 연을 맺고 양부 정원을 죽인 사나이, 야수처럼 전쟁터를 뛰어다녀 모든 장수가 두려워하는 자. 이 세상에서 그처럼 강해 보이는 인간을 초선은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여포의 그 힘차고 늠름하고 거대한 모습을 보며 초선은 갑자기 유두가 돌덩이처럼 굳어지는 것을 감지했다. 동탁에게서는 경험하지 못한, 처음으로 성욕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뒤이어 부끄러움과 강한 자책의 염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유두는 여전히 딱딱했고 이제는 몸의 어딘가가 젖어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지…. 내겐 그보다 머리가 훨씬 뛰어나고 교양 있는 데다 멋진 시를 읊는 조조가 있거늘….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내 몸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초선의 뜻하지 않은 육체의 반응과는 관계없이 장내의 긴장감은 높아만 갔다. 왕좌에 앉은 동탁의 다소 언짢은 듯한 표정을 무시하고 여포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저에게 적토마를 주면 저 혼자서라도 적군 20만쯤은 섬멸해 드리겠소!”

초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 정말 멋지구나. 아무리 적토마라지만 혼자서 20만 병사를 무찌를 수는 없지. 죽는 것은 뻔한 일. 그래도 그는 해볼 만한 일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조조는 도망의 선수인데 여포는 투쟁의 선수로구나…. 정말 양극이야.’ 초선은 적토마를 타고 달리는 여포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가슴에 안겨 숲 속을 달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포. 내 너에게 적토마를 내릴 테니 마음껏 전쟁터를 달려보라.”

이 말을 듣자 여포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여포는 이곳에 들어온 후 초선과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반면 초선은 여포만을 처음부터 끝까지 쳐다보며 계속 감탄하고 있었다. 동탁은 초선의 마음속 미묘한 동요는 눈치채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초선아. 저놈은 아주 단순하고 순수하지만 난폭하고 강하기로도 천하제일인 여포라는 녀석이다. 보기만 해도 늠름하지 않으냐.”

• 여포를 이용해 동탁을 치려는 초선의 비책

남자 가운데 남자다운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 으뜸가는 적토마가 있다. 활통을 등에 메고 손에는 긴 창을 든 여포가 바람처럼 빠른 적토마를 타고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장쾌한 모습! 관운장과의 멋진 대결과 패수관에서의 여포의 활약에 대해, 환도한 장안에서 동탁에 안겨 들은 바 있는 초선은 때때로 여포를 생각하며 감회에 젖고는 하였다. 반동탁연합군이 패수관에서 괴멸되고 조조의 반격군이 참패한 것은 오직 여포의 공적으로 봐야 했다. 희망의 싹이 짓뜯긴 곳의 상처가, 여포를 생각할 때마다 치유되어 가는 것을 초선은 느꼈다. 동탁의 무거운 몸 아래서도 초선은 여포를 생각하며 행복감을 맛보았다. 조조에 대한 연정과는 또 다른 연모였다. 한마디 말도 주고받은 적 없건만 초선은 여포에 대한 그리움으로 온몸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성은 조조를 사랑하라고 하고 있었으나 본능은 여포를 추구하고 있었다.

초선은 동탁의 허락을 받고 오랜만에 왕윤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즈음 왕윤은 동탁의 폭정에 하늘을 우러러 비통해하며 참담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동탁의 애첩이 된 초선이 잠시 다니러 오니 부녀의 정을 다시금 확인하며 작은 위안을 받고 있었다.

하루는 모란정 근처에서 길게 탄식하는 기척이 있어 초선이 다가가 보니 의부 왕윤이었다.

“아버님, 밤이 늦었사온데 어이 주무시지 않고 이리 나와 계시는지요. 무슨 근심이 있으신 게옵니까.”

왕윤은 과년한 딸 초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나이 어느새 16세. 동탁 같은 돼지가 갖기엔 그 재주와 용모가 너무나 아까운 아이였다.

초선의 말을 듣고 왕윤은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초선아, 네가 이렇게 나오는데 내 어찌 입을 다물고 있겠느냐. 이 나라의 운명이 어쩜 한 여인의 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나라의 운명이… 이 말은 예전에도 들은 바가 있었다. 조조와 함께 동탁에게 가기 전의 일이었다. 초선은 다시 때가 온 것을 알았다.

“우선 화각으로 가자.”

화각에 이르자 왕윤은 초선을 자리에 앉히고 갑자기 절을 했다. 초선이 깜짝 놀라 꿇어앉았다.

“대감, 어찌 이러십니까!”

“초선아. 네 정녕 이 나라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긴다면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왕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초선도 그 눈물의 뜻을 아는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말씀드린바 이 몸 나라 일에 소용이 된다면 백 번 만 번 죽어도 사양치 않겠습니다.”

“그래. 내 모두 말하마. 알다시피 지금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동탁이라는 놈이 호시탐탐 천자의 자리를 노리는데도 조정의 문무백관은 그저 눈치만 보고 있구나.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잘 들어라. 동탁에게는 여포라는 양자가 있는데 둘 다 보기 드문 호색한이다. 맞불을 놓아 산불 끄듯 연환지계(連環之計)를 쓴다면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선 너를 여포에게 보여주었다가 다시 동탁에게 돌려보낼 것이다. 무슨 뜻인 줄 알겠느냐?”

“미련한 년이지만 어찌 대감의 뜻을 모르겠나이까. 걱정 마시고 제게 맡겨주세요. 제가 두 장수의 눈을 멀게 하여 거꾸로 세상을 밝히겠나이다.”

왕윤은 초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대견하기도 하고 가엾기도 했다. 왕윤은 탄식하며 속말을 했다. ‘내 이러려고 너를 키운 게 아니건만 난세가 너를 요구하는구나. 네가 두 사람 사이를 이간하여 여포의 손으로 동탁을 죽이게만 한다면 그날로 천하가 바로잡힐 것이다.’

“의부님. 그럼 이제 여포를 부르세요.”

“알겠다. 하지만 그는 여간 난폭한 자가 아니다. 조심해야 할 거야.”

“그만큼 단순하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맡겨두세요.”

동탁에게 그토록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총명한 초선의 눈동자를 보고 왕윤은 탄식과 함께 안도를 하였다. 왕윤은 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의부님,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여기서 나라를 위해 조조와 계획을 짠 것을요.”

“오, 그랬지. 하나 조조가 먼저 칼을 뽑았고 그는 실패했다. 그 뒤로 나는 또다시 너를 위험에 빠뜨리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해서 그때 우리가 계획한, 동탁을 암살하는 일은 잊기로 한 것이다.”

“아니에요, 아버님. 지금이야말로 기회입니다. 일전에 여포를 보고 바로 계책이 떠올랐어요. 이참에 여포 장군의 손으로 동탁을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저 여포만 이리로 불러오시면 됩니다.”

‘하지만 동탁의 양아들 여포가 과연 응할 것인가? 초선이 동탁의 애첩인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여포가 이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왕윤의 속을 꿰뚫어본 듯 초선이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여포 나리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사모하는 사람의 손을 통해 짐승에게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니 동탁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의 뜻대로 되도록 제가 일을 꾸미겠습니다.”

‘뭐라고? 여포를 사모한다고? 어허 여자의 마음은 어찌 이리도 알 수가 없는가.’ 왕윤은 탄식을 하였다.

“묻겠다. 조조에 대한 그리움은 없느냐.”

“그는 옛 남자일 뿐입니다. 개의치 마시어요.”

왕윤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여포의 어떤 매력이 초선을 사로잡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탁보다는 인간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인이 사나이에게 미쳤는데 더 이상 무슨 도리가 있겠나. 초선의 너무나 확고한 결심과 애원하는 눈동자를 보고 왕윤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쩜 진짜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지만 나라의 운명보다 더 중히 여길 수는 없지. 내가 어리석었어. 동탁에게 밀서 따위를 보내 조조가 그를 죽일 수 있는 천우의 기회를 날려버리게 하다니. 아, 나야말로 사소한 부녀의 정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있는 소인배구나.’ 심한 자책 속에서 왕윤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운과 나라의 운명을 제대로 걸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