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림"

2022. 11. 30. 09:39카테고리 없음

🟢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림"

양귀비는 당나라 현종의 며느리이자 부인으로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4대 미인으로 꼽힌다.

이름은 옥환(玉環)이며, 719년 사천성 포주(蒲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촉주(蜀州)의 사호(司戶)라는 하급 관리 양현염(楊玄琰)으로 그녀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 고아가 된 양귀비는 숙부 양현교(陽玄墽) 아래에서 자랐다.

🟢 양귀비
733년 양귀비는 열일곱 살의 나이로 현종과 무혜비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와 결혼했다. 737년 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가 병사하자 현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환관 고력사는 현종을 위로하기 위해 무혜비를 대신할 미녀를 찾고자 중국 전역을 살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현종은 며느리 양귀비를 보고 죽은 무혜비를 떠올리며 한눈에 반했다. 현종은 고력사와 의논하여 그녀를 데려오게 했다. 양귀비는 금(琴)을 잘 탔고 노래와 춤 솜씨도 훌륭했다. 그녀는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아름답게 춤을 추었고, 현종은 양귀비가 며느리인 것도 잊은 채 그녀를 자신의 비로 맞이할 방법을 모색했다. 결국 고력사가 매수한 하녀들의 계속되는 설득과 물량 공세로 양귀비는 남편 이모를 버리고 현종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현종은 우선 양귀비에게 ‘태진(太眞)’이라는 도호를 내려 화산의 도사로 출가시킨 후 그 사이 궁 안에 도교 사원인 태진궁을 짓게 했다. 740년 현종은 태진궁을 관리하는 여관 자격으로 그녀를 궁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마침내 745년 61세의 현종은 첩지를 내려 양귀비를 자신의 귀비로 책봉했다. 비록 귀비였으나 황후가 없는 황실의 귀비는 황후나 다름없었다.
현종은 29년간 어진 정치를 펼쳐 ‘개원의 치’를 이룩한 칭송받는 군주였으나 양귀비를 맞이한 후부터 정사는 돌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백거이(白居易)는 〈장한가(長恨歌)〉에서 “연꽃 방장이 드리운 포근한 봄밤을 함께 지새웠으며, 봄밤이 짧아 안타깝게 아침 해가 떠오르면 조례를 빠지게 되었다.”라며 양귀비에 대한 현종의 사랑을 노래했다. 《구당서(舊唐書)》 〈양귀비전〉에는 “현종의 통치 이래로 호족과 귀족들이 성행했는데 양씨를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현종이 어디를 가든 귀비가 따르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귀비가 말을 탈 때면 고력사가 고삐를 잡아 주었다. 궁 안에는 귀비원에서 비단을 짜는 공인이 700명이나 되었으며, 조각하거나 옷을 만드는 사람도 수백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양귀비가 얼마나 현종의 총애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귀비상마도말에 오르는 양귀비와 그녀를 바라보는 당 현종.
양귀비에 대한 현종의 총애는 그녀의 가족에게까지 쏟아졌다. 현종은 죽은 양귀비의 아버지를 대위제국공에 봉하고, 어머니는 양국부인에 봉했으며, 숙부에게는 광록경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또한 양귀비의 친오빠에게도 홍로경, 시어사, 사공의 높은 벼슬을 하사했으며, 그녀의 세 언니 모두를 왕의 부인에 버금가는 한국부인, 괵국부인, 진국부인으로 책봉하였으니 그 세도가 굉장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세도를 누린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양귀비의 사촌 오빠 양검(陽劍)이었다. 양검은 현종에게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40여 개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이임보가 죽자 승상의 지위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했다. 이렇듯 세상의 권력과 부가 양귀비 일족에게 집중되었다. 백거이는 이를 〈장한가〉에서 “마침내 천하의 모든 부모들은 아들 낳기를 중히 여기지 않고 딸 낳기를 중하게 여기네.”라고 표현했다.
현종은 양귀비뿐만 아니라 그녀의 언니인 괵국부인과도 밀회를 했다. 이는 당시 만연했던 풍조로 황족은 여러 친족과 통혼할 수 있었다. 현종이 괵국부인에게 빠져 자신을 찾는 횟수가 적어지자 양귀비는 괵국부인의 입궐을 금지했다. 이를 괘씸히 여긴 현종은 급기야 양귀비를 양국충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자신과 양씨 일족의 존폐가 양귀비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안 양국충은 환관 고력사에게 현종의 마음을 달랠 방도를 의논했다. 양국충과 고력사는 현종과 양귀비를 장안 동쪽에 있는 온천 별궁인 화청지로 보냈다. 그곳에서 목욕하는 양귀비를 본 67세의 현종은 다시 그녀에게 반해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양귀비에게 흠뻑 빠진 현종에게 정사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정치는 승상 이임보의 농간에 넘어갔다. 변방에서 군사적 공을 쌓은 이들이 자신의 반대 세력으로 성장할 것을 우려한 이임보는 현종에게 그동안 문사가 담당했던 변방의 절도사를 이민족 출신으로 대신할 것을 아뢰었다. 이에 현종은 이임보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녹산, 고선지(高仙芝), 가서한(哥舒翰) 등을 절도사와 장군으로 임명했다.

747년 현종은 변방의 절도사 안녹산을 환영하는 연회를 열었다. 안녹산은 우람한 몸집과 넉살 좋은 성격, 거칠 것 없는 입심과 행동으로 우스꽝스러운 행동도 마다하지 않아 현종과 양귀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현종은 그를 총애하여 양귀비의 양자로 삼게 했다. 안녹산은 현종과 양귀비의 총애에 힘입어 751년 하동 절도사에 임명되어 병력의 3분의 1을 장악할 정도로 세가 커졌다.
안녹산의 세가 점점 커지자 위협을 느낀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번 양귀비가 안녹산을 변호하여 그를 구했다. 그러나 이임보의 죽음으로 자신을 비호해 주던 세력이 줄어들고, 양국충의 비방으로 위기감을 느낀 안녹산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켰다.
755년 안녹산은 간신 양국충을 타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성을 무너뜨렸고, 756년 여름 여세를 몰아 15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진격했다. 이 소식을 접한 현종은 양귀비와 그녀의 가족, 몇몇 대신들을 이끌고 양국충 가문의 기반인 사천으로 피란을 떠났다.
현종과 양귀비가 마외역에 도착했을 때 금군의 병사들이 정변을 일으켰다. 금군의 병사들은 양국충과 양귀비의 언니 한국부인을 죽이고,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것은 현종이 양귀비에게 빠져 정사를 살피지 않은 탓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병사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현종에게 그녀의 일족을 죽이고 양귀비도 사사시킬 것을 강요했다. 병사들의 요구에 불응할 경우 자신의 목숨도 보장받지 못할 것을 깨달은 현종은 양귀비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현종은 무력하게 양귀비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고 양귀비는 마외역관 앞 배나무에 비단 천을 감고 목을 매 자결했다.
병사들은 양귀비의 죽음에 환호하고 그녀의 죽음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피란길에 올랐다. 안녹산의 난은 태자 이형에 의해 평정되었으며, 후에 이형은 숙종 황제로 즉위하고 현종은 태상황이 되었다.
양귀비가 죽은 후 장안으로 돌아온 현종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환관 고력사에게 옛사람을 찾아오라고 시켰다. 이에 고력사는 양귀비의 시녀였던 홍도(紅桃)를 데려왔고, 현종은 그녀에게 양귀비가 생전에 만들었던 〈양주사(凉州詞)〉를 부르게 했다. 노래가 끝난 후 현종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되었다고 한다. 또한 현종은 환관을 시켜 마외역에 있는 양귀비의 묘를 이장하려 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몰래 환관에게 명을 내려 묘를 이장했는데, 그때 묘를 팠던 환관이 생전에 양귀비가 사용했던 향주머니를 발견하여 이를 현종에게 진상했다. 향주머니를 받아 든 현종은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현종은 양귀비를 그리워하다 그녀가 죽은 지 6년이 지난 762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양귀비의 미모는 ‘수화(羞花)’, 즉 ‘꽃이 부끄러워한다’라는 말로 대변된다. 이 말은 열일곱 살에 궁에 입궐한 양귀비가 아직 현종의 눈에 띄기 전인 어느 날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정원에서 꽃을 구경하던 양귀비가 화려하게 핀 모란과 월계화를 보고 덧없이 지나가는 청춘을 아쉬워하며 “꽃아! 너는 해마다 피어나지만 나는 언제 빛을 보겠느냐!”라고 탄식하며 꽃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러자 꽃이 서서히 오므라들었고, 마침 지나가던 궁녀가 이 모습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가는 곳마다 “양귀비가 꽃들과 아름다움을 견주었는데, 꽃들이 모두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하는 소문을 냈다는 일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