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30. 09:37ㆍ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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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인계의 여인 '서시(西施)'와 ‘동시효빈(東施效嚬)’, ‘서시빈목(西施嚬目)’
구천(문종,법려의 계략)이 부차에게 진상한 월나라 서쪽에서 찾은 미녀, 후대의 양귀비외 비견되는 절세미인이다. 얼마나 예쁘면 빨래터 물 속에 고기가 지나가다 서시의 미모에 헤엄치는 것을 잊고 그대로 가라 앉았다고 한다.(이로써 서시는 '침어(沈漁)'라는 칭호를 얻음)
중국 최초의 미녀 첩보원
서시는 춘추 시대 말기 월나라가 오나라 부차에게 보낸 여인으로 부차의 후궁이 되어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이며 월나라 저라산(苧羅山)에서 태어났다. 왕소군(王昭君), 초선(貂嬋),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역사상 4대 미인으로 꼽힌다.
🟢 서시
춘추 5패 중 하나였던 오나라는 제6대 왕 합려 때 전성기를 누렸다. 오왕 합려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초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가면서 세를 떨쳤는데, 기원전 496년 신흥국 월나라를 공격했다가 전쟁 중에 중상을 입고 퇴각했다. 그때의 부상이 악화되어 합려는 죽음에 이르렀고, 죽기 전 합려는 왕위 계승자인 차남 부차에게 월나라에 복수할 것을 다짐시켰다. 다음 왕이 된 부차는 섶나무 깔개에서 잠을 자며 설욕을 되새겼고,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국력을 키워 나갔다.
기원전 494년 부차가 월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국력을 키운다는 첩보를 입수한 월왕 구천은 선수를 쳐 오나라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 전투는 두 나라의 구도를 바꾸어 놓았다. 구천은 회계산에서 오나라 군대에게 포위되었고 결국 오왕 부차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인질로 끌려갔다. 오나라에서 3년간 비참한 인질 생활을 한 구천은 기원전 490년 책사 범려의 도움으로 월나라로 돌아와 국력을 키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이때 구천은 쓸개를 걸어 두고 매일 그것을 핥으면서 치욕을 되새겼다. 구천은 부차에게 미녀와 금은보화를 예물로 바치며 환심을 사면서 그를 방심시켰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오왕 부차가 기원전 489년 제나라를 공격할 때 전쟁을 말리던 오자서와 크게 사이가 벌어진 것이다. 추(鄒)나라, 노(魯)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이은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부차는 결국 구천을 경계하라는 오자서의 충언을 무시했다. 그러나 눈앞의 승리는 장기적으로 오나라의 국력을 소진시켰다. 구천은 이를 부채질하기 위해 원군을 보내 부차의 원정을 지원하는 한편 미인계를 계획하여 방탕한 생활을 유도했다.
이런 계획에 따라 월왕 구천의 책사 범려는 미인을 찾아 각지를 돌아다녔다. 저라산 약야계(若耶溪)에 이르러 범려는 비로소 오왕 부차를 무너뜨릴 만한 미모를 지닌 두 명의 미인, 서시와 정단(鄭旦)을 발견했다.
서시의 뛰어난 미모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일화가 전한다. 서시가 강가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물고기가 강물에 비친 서시의 아름다움에 반해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런 서시의 아름다움에 빗대 ‘침어(侵魚)’라는 성어가 생겨났다. 또한 《장자》에는 ‘동시효빈(東施效嚬)’, ‘서시빈목(西施嚬目)’이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어느 날 서시가 속병으로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리고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마을의 추녀 동시(東施)가 서시처럼 이마를 찌푸리면 아름답게 보이는 줄 알고 그녀를 따라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길을 걸었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혹여 그 추녀의 얼굴을 볼까 싶어 문을 걸어 잠그고 외출을 삼갔다는 이야기다.
범려에게 발탁된 서시는 다양한 기예와 이성을 유혹하는 방법, 정보 수집 방법 등을 교육받았다. 서시를 교육하는 동안 범려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지만 오나라에 대한 복수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서시를 오왕 부차에게 바쳤다. 호색한이던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후궁으로 삼았다. 오자서는 부차의 이 같은 처사에 반대하며 다시 한 번 월나라의 구천과 범려를 경계하고 월나라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간언했다. 그러나 부차는 오자서가 자신의 행동에 매번 반기를 들자 점차 그를 멀리했다.
부차는 서시를 고소대(姑蘇臺)에 기거하게 하고 그녀를 위해 왕손 웅(雄)을 시켜 영암산(靈巖山)에 별궁 관왜궁(館娃宮)을 짓게 했다. 관왜궁은 구리, 옥돌, 주옥 등의 화려한 자재로 지어졌고, 회랑은 ‘향섭랑(響屧廊)’이라는 독특한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양식은 땅을 파서 큰 옹기를 묻은 후 그 위를 양탄자로 덮은 것으로 나무 신발을 신고 걸어가면 발소리가 영롱하게 들리는 장치였다. 또한 인공연못 완화지(翫花池)와 완월지(翫月池)를 조성하고 인공동굴 서시동을 만들었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와 교태에 빠져 정사를 멀리했고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벌여 국가 재정을 낭비했다.
월나라는 오나라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키기 위해 기근을 핑계로 식량 원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오자서와 오나라 대신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월나라의 계획이 무산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를 눈치챈 서시는 부차를 설득하여 월나라에 식량을 원조하게 했다. 다음 해 오나라는 월나라가 갚은 식량으로 농사를 지었지만, 월나라가 겉은 좋으나 속은 상한 식량을 보내 그해 흉년이 들었다. 오나라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졌고 국가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오나라의 민생과 재정은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 오나라에는 상국 오자서가 건재했다. 월왕 구천과 범려는 오나라를 공격하기에는 시기상조임을 깨달았다. 이들은 오나라의 태재 백비와 서시로 하여금 부차의 패권 야욕에 불을 지펴 대외 전쟁에 몰두하게 하는 한편 부차와 오자서의 사이를 이간했다.
부차는 기원전 485년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오자서를 제나라 사신으로 파견했다. 아들과 함께 제나라로 간 오자서는 오나라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하고 아들을 제나라의 포씨에게 맡기고 홀로 귀국했다. 서시와 백비는 이것을 기회로 오자서가 모반을 계획하고 있다고 모함했고,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했다. 서시의 활약으로 월나라는 오나라의 최고 참모 오자서를 제거하여 부차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국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충신 오자서를 잃은 오나라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부차는 기원전 485년 제나라를 공격했다가 패배함으로써 국력을 낭비했고, 기원전 483년과 482년 연이어 회맹에 참가하기 위해 오나라의 수도를 비웠다가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또 한 번 국력을 약화시켰다. 기원전 475년 월나라의 총공격을 받은 오나라는 연이어 패배했고, 기원전 473년 월나라에 항복했다. 이해 부차가 자결하면서 오나라도 멸망했다.
부차의 자결과 오나라 멸망 이후 서시의 행방은 전설로만 전해진다. 먼저 오왕 부차가 자결했을 때 오나라 백성들은 서시를 망국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그녀를 비단으로 묶어 장강에 빠뜨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오나라가 멸망하는 날 범려가 서시를 데리고 태호(太湖)로 도망가 배를 타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범려와 서시는 결혼하여 도지(陶地)에 정착하고, 범려는 장사를 해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가장 믿을 만한 일화는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묵자》의 〈친사(親士)〉에 기록된 것으로 서시가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백성들 사이에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서시를 동정하여 그녀가 범려와 함께 부유하고 안락한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오래도록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