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30. 09:28ㆍ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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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 선우에게 빼앗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미인, 왕소군
"선우는 아침에 영(營)을 나와 해가 처음 뜨는 곳을 향해 절하고 저녁에는 달을 향해 절한다....거사(擧事)할 때는 별과 달을 살펴 달이 차면 공전(攻戰)하고 달이 이지러지면 퇴병(退兵)한다." <사기, 흉노열전>
"그들의 풍속은 한가할 때는 가축을 기르며 새나 짐승을 사냥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위급할 때에는 전공(戰攻)에 능해 침벌(侵伐)하니 그들의 천성이 그러하다....유리하면 진격하고 불리하면 퇴각하니 달아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으면 예의(禮義)를 차리지 않는다....아버지가 죽으면 그 후모(後母)를 처로 삼고, 형이 죽으면 그 처를 아내로 삼는다. 그들의 풍속은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성(姓)이나 자(字)는 없다."<사기, 흉노열전>
'흉노'라는 명칭은 <사기> 흉노전에 소개된 이후에 중원의 북쪽에 위치한 광대한 유목지대에서 생활하는 기마민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35 종류의 종족이 있으나 각자 영역은 나뉘어져 있다(各有分地)고 했다.
"북쪽 변경에 살며 풀을 따라서 목축을 하고 성곽이 없으며 밭갈이로 생업을 한다. 육식을 좋아하고 사내들은 칼쓰기와 활쏘기에 능하며 갑옷을 입고 말을 잘 달린다. 장거리는 활로서 하고 단거리는 칼로서 한다. 건장한 자를 귀하게 여기며 노약한 자를 천하게 여긴다"<한서, 흉노전>
중국 후한(後漢) 초기에 반고(32-92)가 집필한 <한서(漢書)> 흉노전에 북방 흉노족에 관해서 이렇게 묘사했다. <한서>는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이어서 두번째로 저슬된 중국 정사로서 <삼국지> <후한서>와 함께 전4사(前四史)로 불리는 역사책이다.
흉노의 생활터전은 척박한 땅이라 이들의 호구지책은 주로 약탈경제에 의존했다. 말을 잘타고 칼과 활을 장난감 놀이 하듯이 사용하며 중원을 털어가는 북방 기마민족한테 늘 당하고 살아온 한족은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떠들석한 오랑캐 새끼들" 이라고 붙여준 멸칭이 '흉노(匈奴)'다. 중국발음으로는 '쓩누'라고 하는데 이것은 흉노족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슌누'를 폄하하는 의미에서 비슷한 발음의 한자를 빌어 쓴 것이다.
흉노는 하상주 시대부터 훈육(獯粥), 귀방(貴方), 험윤(獫狁), 진(秦)대에 이르러 흉노, 호(胡)라고 불려졌다. 척박한 환경이지만 대자연을 벗으로 삼아 태양을 숭배하는 천손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지도자의 호칭인 선우(單于)는 '위대한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천자(天子)와 같은 의미이다.
알고보면 우리 한민족과는 같은 뿌리를 가진 중앙 아시아 북방계 민족이다. 따라서 지나인들이 비하하는 '흉노'라는 욕칭보다는 향기로운 풀을 의미하는 '훈족(薰族)' 으로 부르는 것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다.
두만(頭曼, 재위 220 -209)선우가 지배하는 흉노가 중국사에 처음 등장하는 시점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군림했던 시기와 같다. 장군 몽염을 시켜 만리장성을 쌓게할 정도로 진시황이 두려워했던 호(胡)가 흉노이었다. 이들은 섬서성 북방 오르도스 지방까지 내려와 생활하면서 중원을 침범했다. 두만을 이어서 흉노의 선우가 된 모둔(冒顿, 묵돌 BC 209-BC 174)은 동호, 월지, 누번을 정복하고 최전성기의 흉노제국을 건설했다.
묵돌은 '바야투르(Bayatur, 용감한 자)'라는 뜻으로 '영웅'을 의미하는 몽골어 '바토르', 우리 고대어 '밝달'과 같다. '밝달임금'을 '단군(檀君, 壇君)이라고 하니 묵돌은 흉노의 단군이었다.
서기전 202년, 한제국을 건설한 유방이 호기롭게 4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했다. 하지만 모둔은 약한 병졸을 앞세워 유방군을 유인하여 산서성 평성(오늘날 대동시)에 있는 백등산(白登山)에 몰아넣고 포위했다. 유방은 7일동안이나 포위당하고 굶은 끝에 동생이 되기로 하고 항복했다. 고초를 치른 유방은 유씨 집안의 종실녀를 모둔선우에게 시집보내고 비단과 쌀, 술등 공물을 해마다 바치기로 하는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당시 흉노의 위세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유방이 죽고나서 모둔왕이 홀로 남은 젊은 여후에게 보낸 모욕적인 연애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고(孤,나)는 의지할 곳 없는 쓸쓸한 임금으로 습한 땅(沮澤)에서 태어나 소, 말을 놓아 기르는 평야에서 자랐으니 여러 차례 변경으로 가 중국(中國)을 유람해보길 원했습니다. 폐하, 이제 홀몸이 되었으니 외로운 사람과 홀로사는 사람이 함께하지 않는 다면 어찌 즐거워 할줄을 안다고 하겠습니까? 원컨데 나의 있는 것으로 그대의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해 봄이 어떠하리요(孤僨之君 生於沮澤之中 長於平野牛馬之域 數至邊境 願遊中國 陛下獨立 孤僨獨居 兩主不樂 無以自娛 願以所有 易其所無)" <출처, 사기 흉노열전>
여후는 대노하여 흉노를 치고자 했으나 유방이 당한 '평성의 치욕'을 잘 아는지라 공손하게 답을 보냈다
"선우께서 이땅을 잊지 않고 놀러 오시겠다는 말씀을 주시니 감사하오나 저는 이미 나이 많아 기력이 쇠하고, 머리가 희고, 이가 빠지고, 걸음이 여의치 못하니 실례를 저지를까 염려하여 부끄러울 뿐 입니다"
여후가 죽고 유방의 네째아들인 한문제가 즉위했지만 여씨 일족이 도륙을 당하는 등 내정이 혼란하여 흉노를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돈선우의 뒤를 이은 노상 선우에게 종실녀(宗室女)를 보내 선우의 연지(처)로 삼게하여 흉노를 달랬다.
흉노는 한나라에 국서를 보낼때도 한나라가 사용하는 나무쪽보다 딱 1촌이 긴 1척2촌의 독(牘, 글씨를 쓰는 나무쪽)을 쓰고 인장과 봉니封泥)도 더 큰 것을 사용하고 스스로 대선우라고 자칭했다.
“천지(天地)가 낳고 일월(日月)이 세워 주신 흉노 대선우가 삼가 묻노니 한나라 황제는 무양하신가? (天地所生日月所置匈奴大單于敬問漢皇帝無恙)”
조선시대의 모화사상에 젖은 선비들이 당시에 살았다면 대국에 대한 신하국의 예의가 아니라고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한나라가 건국된지 60년이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 유방의 증손자 유철이 16세의 어린 나이로 7대 황제(한무제)에 올랐다(BC 141). 흉노 혼사왕이 한나라의 수도 장안까지 쳐내려 왔다. 젊고 야심찬 무제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기 위하여 50여년의 재위기간 동안 전 국력을 기울려 흉노 정벌전을 감행했다. 백전노장 곽거병. 청년장수 위청 등 뛰어난 장수들을 앞세워 흉노를 멀리 고비사막 북쪽으로 구축하고 무위, 장액, 주천, 돈황에 이르는 감숙성의 '하서 4군'을 획득했다. 이 지역이 훗날 서역으로 통하는 비단길의 출발지가 되었다.
기련산을 잃은 흉노는 "우리는 기련산을 잃었네. 이제 가축을 먹일 수 없네. 우리는 연지산(燕支山·감숙성 하서주랑)을 잃었네. 여인들의 얼굴을 물들일 수 없네" 하고 슬피 울었다.
10대 황제 선제(BC 73- BC 48) 유순(劉詢)은 한무제의 증손자로서 한, 흉노관계를 역전시킨 인물이다. 기원전 71년에 15만의 대군을 일으켜 흉노를 침공했다. 이 원정으로 흉노는 괴멸되어 다섯 흉노로 나누어져 한나라를 침공할 수 없는 약체로 전락했다. 기원전 51년에는 분열된 흉노 가운데 남흉노에 속하는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에 항복하고 귀부해 왔다. 선제는 호한야 선우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 지위를 제후왕의 위에 두고 황제를 알현할 때 칭신을 하지만 스스로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최상의 대우를 했다. 조선왕 이성계는 명나라에 표문을 보낼때 '臣 조선왕 이성계'로 시작했음을 기억하자.
친 한나라 정책을 유지하던 호한야 선우(BC 58-BC 31)는 선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원제 (BC 48-BC 33)에게 한나라의 사위가 되어 인척이 되고자 한다고 요청했다. 이때 비운의 천하절색인 왕소군(王昭君)이 한나라와 흉노 사이에 등장하게 된다. <한서> 원제기에 기원전 33년 봄 정월에 호한야 선우가 입조하여 혼인을 요청하자 왕장(王檣)을 신부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왕장이 곧 중국 4대미인의 한사람인 왕소군이다.
한나라 황제는 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어서 화공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후궁을 골라 동침했다. 집안이 좋고 재력이 있는 가문에서 선발된 궁녀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고 예쁘게 그려달라고 했지만 왕소군은 자신의 미모를 믿고 뇌물을 주지않아 화첩에 있는 그림으로만 궁녀를 선택한 황제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원제는 한의 수도 장안으로 장가들러 찾아온 선우를 위하여 한 궁인을 지명했다. 그러나, 출발전에 황제에게 인사차 찾아온 궁인을 보고 원제는 그 아름다운 자태에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화공 모연수가 그려서 바친 궁녀들의 화첩에서 일찌기 발견한 적이 없는 천하의 미인이었다.
왕소군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BC 38년에 16세의 나이로 궁녀로 들어간 것으로 본다. 5년간을 한번도 황제의 총애를 받아보지 못하고 비파라는 악기로 외로움을 달랬을 뿐이었다. 약속은 이미 이루어져 돌이킬수 없는 사태에 당황한 원제는 자초지종을 알아보고는 화공 모연수를 참형에 처하고 말았다.
눈이 뒤집힌 원제는 혼수가 미비하다는 핑게로 왕소군을 자기 침소로 불러 밤낮 3일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한나라 궁성 안에 있는 천하의 미인을 5년씩이나 알아보지 못하다가 단지 3일로 만족하고 남에게 빼앗긴 원제는 후일 원통한 마음을 달랠길 없어 몇달 후에 유명을 달리했다. 지어낸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그만큼 미색이 뛰어났다는 이야기다.
한족의 미인을 저들이 멸시하던 '오랑캐'에게 빼앗긴 후세의 시인들은 앞다투어 왕소군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황궁을 나서는 왕소군을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노래했다.
소군이 옥안장에 치맛자락을 날리네(昭君拂玉鞍 )
말위에서 흐르는 눈물 붉은 볼을 적시네(上馬啼紅頰)
오늘은 한나라의 궁인이여(今日漢宮人 )
내일 아침은 오랑캐 땅의 첩이 되는가(明朝胡地妾)
당나라의 시인 동방규는 소군원(昭君怨)을 지어 삭막한 낯설은 땅에서 고향을 그리는 왕소군을 노래했다.
오랑캐 땅에는 화초도 없다는데(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몸이 말라 허리띠 날로 줄어드니(自然衣帶緩 )
날씬한 허리를 자랑함이 아니네(非是爲腰身)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동방규의 "소군원" 이라는 이 한수의 시로서 왕소군은 "춘래불사춘"의 미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양귀비의 아름다움은
꽃마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羞花)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기러기마져 넋을 잃고 땅으로 떨어져(落雁)
서시의 아름다움에
물고기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네 (沈魚)
초선의 아름다움에
달빛 마져 부끄러워 숨어 버렸다오(閉月)
중국의 4 대 미인 양귀비, 왕소군, 서시, 초선의 아름다움을 시인들은 이렇게 최상의 비유로 노래했다. '물고기가 가라앉고 기러기가 떨어지고 달은 숨고 꽃도 고개를 숙인다는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라는 귀절은 원래 진(晉)나라 헌공의 부인인 여희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표현이었다. 맹자와 동시대 인물인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 편에 나온다.
허풍을 떨기로는 세계일등인 중국의 문장가들은 침어, 낙안, 폐월, 수화에 대응하여 4대 미인을 만들어 냈다. 왕소군은 사서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에서 갖가지 이야기로 가공되어 전한다.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서 위대하게 만들어 지고 미인은 대문장가를 만나야 이름을 얻을수 있나 보다. 늙은 황제와 젊은 며느리의 불륜으로 끝났을 법한 당황제 이융기와 양귀비의 이야기는 대문호 백낙천이 '장한가(長恨歌)를 짖고 나서야 유명세를 타게 되었으니 말이다,
호한야 선우의 연지(閼氏)가 된 왕소군은 아들을 낳았다. 젊은 부인과 과하게 즐긴 나머지 왕소군을 맞이한 2년후(BC 31년)에 호한야는 죽음을 맞이하니 이때 왕소군은 한창 나이인 20대이었다. 기마민족의 풍습에 따라 후처인 왕소군은 다시 호한야의 맏아들 복주루와 결혼하고 딸을 낳았다. 아주 원만했던 11년간의 결혼생활후에 복주루마져 사망하니 이때 왕소군은 30대의 중년이 되었다.
3일간의 짧았던 원제의 품을 떠나 아버지와 아들을 차례로 남편으로 맞이한 왕소군은 노후에 이국땅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그녀의 무덤에는 겨울에도 푸른 풀이 솟았다고 하여 청총(靑塚)이라고 부른다. 내몽골의 수도 호화호특(呼和浩特)에 왕소군의 거대한 무덤과 조각상이 후인을 반긴다.
유교 윤리관에 물던 한족은 흉노의 형사취수(兄死取嫂) 관습을 비윤리적으로 보고 왕소군의 생애를 비극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은 윤리 이전에 그들이 생존하는 방법이었다. 한문제때 종실녀를 수행하여 흉노 땅을 밟았다가 아예 귀부한 환관 중항열(中行說)은 이렇게 말했다.
“흉노의 인구가 한나라의 군(郡) 하나도 당해내지 못하나 그럼에도 흉노가 강한 이유는 입고 먹는 것이 서로 달라 한나라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부자(父子), 형제가 죽었을 때 그의 처를 취해 아내로 삼는 것은 종성(種姓,종족)이 끊길까 꺼려하기 때문이오...흉노는 분명 전공(戰攻)을 중요한 일로 삼고 노약자는 싸울 수 없으니 이 때문에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장건한 자에게 먹고 마시게 하여 대저 이로써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오. 이와 같이 하여 부자(父子)가 각기 서로 보전할 수 있으니 어찌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 말할 수 있겠소?"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인 북송시절의 소동파(蘇東坡)는 학문이 뛰어났으나 정쟁에 휘말려 멀리 남쪽 해남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그는 인생의 덧없음을 '설니홍조(雪泥鴻爪)에 비유했다. 눈과 진흙위에 앉았던 기러기의 발자욱은 흔적없이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대초원의 삭풍을 헤치고 말달리는 흉노의 기상도, 제국의 위엄과 영광을 한 몸에 지닌 황제도, 기러기마져 넋을 잃고 떨어지게 만든 왕소군의 아름다움도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모두 사라졌다. 봄이 올 때마다, 그리고 그 봄이 봄같지 않을 때 우리는 항상 왕소군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