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30. 09:14ㆍ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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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전투 - 적벽대전(赤壁大戰) 2
유럽이 하나의 대제국을 형성하고 로마의 통치를 받던 시절, 중국은 천하통일과 군웅할거가 반복되는 가운데 잦은 왕조교체를 보이고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중국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유럽에 비하면 너무 조잡하고 특히 군대의 특성과 전술의 발달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우며, 다만 유명한 장군들의 무용과 지략에 관한 이야기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 역사에서는 221년 후한(後漢)이 멸망하고265년 서진(西晉)이 수립되어 천하를 통일했는데,그 중간에 해당하는 44년은 위(魏), 촉(蜀), 오(吳)나라 3국이 천하를 나누어 다스린 이른바 삼국시대였다. 삼국은 세력균형을 유지하기보다는 서로 천하를 장악하기 위한 살벌한 싸움을 벌임으로써 또 하나의 전국시대를 겪었다.
중국 원 나라 말기의 유명한 장편 역사소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바로 후한 말 동란 시대와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그 시대 영웅들의 싸움을 소설화한 것이다. 흔히 이 소설을 평할 때 실7허3, 즉 사실 70%, 허구 30%라고 하는데,그만큼 사실에 가깝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동란시절 군웅들이 즐비하게 나타나 각축전을 벌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두각을 나타낸 자들은 조조,유비, 손권 등이었다. 중원의 패자가 된 조조는 중국 북부를 완전히 통일하고 이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부로 진격했다. 이에 유비는 그가 삼고지례(三顧之禮)를 다하여 맞아들인 제갈공명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으며 손권과 손을 잡고 조조의 군대에 대항하게 되었다.
관도의 전투에서 원소를 물리쳐 화북의 패권을 장악하고 중국 북부를 평정한 조조는 건안(建安) 13년(208) 7월, 목표를 남쪽으로 돌려 형주(荊州)와 강동(江東) 공략을 시작했다. 강동의 손권이 먼저 형주를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면 천하의 판도를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비도 제갈량의 천하 삼분 계책을 받아들여 형주를 근거지로 확보하기 위해 형주의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고, 손권도 노숙(魯肅)의 계책에 따라 세력을 확장하고 조조와 맞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형주를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호시탐탐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먼저 차지해야 하는 요충지 형주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군웅들이 하나같이 형주를 노린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형주의 유표가 형주를 지킬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8월, 유표가 죽고 그의 막내아들 유종이 그 뒤를 이었다. 조조의 백만 대군이 형주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유종은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해 버렸다. 순조롭게 형주를 접수한 조조는 내친김에 눈엣가시인 유비를 제거하기 위해 유비의 근거지인 신야(新野)로 말머리를 돌렸다. 당시 유비는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늦게야 이 사실을 안 유비는 급히 강릉(江陵)으로 퇴각하였다. 강릉은 군사상의 요지이자 병력과 물자의 중요한 보급 기지였다. 유비가 강릉으로 퇴각한다는 사실을 안 조조는 5,000의 기병을 거느리고 하루낮 하룻밤 300리를 달려 유비의 뒤를 추격하여 장판파(長坂坡)에서 유비를 공격하였다. 유비는 대패하여 지름길을 따라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가 주둔하고 있는 하구(夏口)로 도망했다.
한편, 조조의 백만 대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강동의 손권은 군사를 시상(柴桑)에 주둔시키고 정세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나, 뾰족한 수가 없어 우선 노숙을 파견하여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북으로 올라가던 노숙과 남으로 내려오던 유비가 당양에서 마주쳤다. 노숙은 유비에게 일단 하구로 가 손권의 군사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할 것을 제안했다. 불감청 고소원이 아니었던가! 유비는 노숙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조는 강릉을 점령한 후 유비를 치기 위해 다시 말머리를 하구로 돌렸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된 유비는 손권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제갈량을 파견했다. 제갈량은 노숙과 함께 손권이 주둔하고 있는 시상으로 건너갔고, 유비는 번구(樊口)에 주둔했다.
당시 손권의 강동 지역은 장소(張昭)를 주축으로 하는 주화파와, 주유(周瑜)와 노숙을 주축으로 하는 주전파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손권은 이 두 파의 사이에서 아직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전쟁은 엄밀히 따지면 조조와 유비 사이의 문제이지 손권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손권의 입장에서는 유비를 돕기도 애매하고, 유비를 돕지 않고 조조의 편에 붙는 것도 애매하며, 그렇다고 뒷짐 지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비를 돕자니 그 불이 자기 옷까지 옮겨 붙을 수가 있고, 유비를 돕지 않아 유비가 망하면 그야말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이 되며, 조조의 편에 섰다고 해서 조조가 손권을 가만히 놔둘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은 손권에게 세 가지를 들어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첫째, 관망만 하고 있을 경우 결국 손권 스스로에게도 화가 미치게 된다. 둘째, 쌍방이 연합할 경우 반드시 승리한다. 셋째, 조조를 이긴 후에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정립(鼎立)의 형세를 만들자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가 손권에게 서신을 보내왔는데, 이 서신이 바로 적벽대전의 뇌관을 건드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近者奉辭伐罪, 旄麾南指, 劉琮束手.
(근자봉사벌죄, 모휘남지, 유종속수.)
今治水軍八十衆, 方與將軍會獵於吳.
(금치수군팔십중, 방여장군회렵어오.)
이번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죄인들을 쳤노라. 나의 군기가 남방을 가리키니 유종이 투항을 했더라.
이제 80만 수군을 정비하여 오에서 장군과 함께 사냥을 할까 하노라.
명명백백한 도전장이었다. 형주를 점령하고 유비를 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던 조조의 창끝이 다시 손권에게 향한 것이다. 이 서신에 대경실색한 중신들은 조조에게 투항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계속)